인생의 본질은?
악필인가 영빨인가? ㅎㅎㅎ
대학 워크숍에 참석해서 생각나는 단상을 갈겨 놓은 필자의 발가 벗은 노트다.
오늘 아침은 유난히도 매서운 날씨다.
차거운 날씨와 더불어 세상 살이도 더 각박하게 다가 오는가 보다.
어제 하루, 사회 뉴스 면에는 추운 날씨에 어울리는 사건 사고가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누구나 선의로 열심히 살고 있지만, 뜻하지 않게 악재로 오해를 받게 되고, 이것으로 인해 사회 곳곳에 소통의 단절 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추운 한파로 인해서 이 사회를 더욱 동토의 나라로 만들어 가고 있다.
한 편으로는 새삼스레, 계절의 의미를 생각하게도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우리를 변화에 잘 적응하도록 하게 하는 의미다. 어쩌면 자연의 상식적인 이치를 깨닫게 하려는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는 아닌지? 변화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의 비교 변화도 또 다른 변화의 징조가 아니겠는가?
생성하고 변화하며, 발전하면서 성장하고, 성장하면서 또한 소멸하고 사라지는 것이 생명의 이치다. 이에 순응하지 않고, 거역하는 한, 그 인생은 어려운 시련과 고난의 산을 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적으로는 ‘도전’이라는 미사여구로 장식 되어 입에 오르 내리고 있지만, 결국은 자기 본연의 초라한 순응의 자리로 되 돌아와 얌전하게 앉게 된다.
이 자리를 우리는 낮은 자리, 겸손의 자리라고 부른다.
겸손은 자연의 이치를 따르고 순응하는 자리를 일컫는 말이다. 겸손한 자리를 떠난 자리를 우리는 ‘교만’이라고 부른다. 교만이란, 그런 어미에서 자연의 이치를 깨닫기 위한 과도기적인 성격을 지닌다 하겠다. 교만이란, 정상 상태를 잠시 벗어난 비정상 상태이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시 정상으로 돌아 갈 잠시 머무는 공간을 일컫는 말이다.
교만이란, 잠시동안 자연을 벗어난 인간적인 객기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그렇다. 태어나서 잠시 교만의 상태에 머물다, 죽어서 다시 낮은 정적인 상태로 돌아와 조용히 누운 것이, 겸손한 인생을 극단적으로 잘 표현한 내용이라고 하겠다. 결국은 떠난 자기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리라.
굳이, 각 자가 노력해서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순응하면서 겸손해 지지 않아도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겸손의 낮은 자리로 돌아와 안식하게 된다. 삶이란, 자연의 겸손한 자리를 떠나서 다시 돌아 올 때까지 누구나 겪는 교만의 계절이라고 하겠다.
존스타인벡이 지은 소설 중에 ‘분노의 포도’가 있지만, 이 모든 것이 과도기적인 인생 삶을 묘사하는 내용이 되겠다. 우리 삶이 처해 있는 상황을 ‘분노의 계절’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우리가 혈기를 부리고 분노를 나타내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인생의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하겠다.
혈기가 사라지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하고, 겸손하기 위해서는 삶을 포기하는, 죽는 결단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은 인생이 죽음이 본질이 아니고,
삶이 본질이라고 여기기 때문은 아닐까? 상처와 죄가 우리 인생의 본질이다. 이를 원죄라고 규정하는 것은 아닐까? 본질은 죽음이지만, 죽음을 통해 빛으로의 부활하게 하는 것이 또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아름다운 뜻이다.
본질은 우리에게 부여된 속성이지만, 속성을 인정하고 겸손한 죽음의 안식을 취할 때에 빛되신 주님으로 나아가는 영적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할럴루야, 아멘!
♡ 안응 곽계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