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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이고, 나도 산이다. ㅎㅎㅎ!

아, 가을인가? 

가을은 시인을 만든다. 

왜? 하필이면 이 가을이 시인을 만들까? 

우리가 가을이라는 사물을 따로 구별하여 인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가을이  가을인가? 라는 이유를 묻지 않고도 때가 이르면, 

가을이라는 변치 않는 인식을 하도록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을을 못내 아쉬워하며, 가을을 흉내내어 닮고자하는 것이 시로 표현되어 나오는 것이다. 시인은 가을을 깊이 느끼는 사람이고, 시는 그 깊은 심정에서 나타나는 애톳한 표현이다. 

오늘 이 아침에 굳이 가을을 노래하는 것은, 세상 사물을 구별하고자 하는 사람의 원습에 대해서 논하고자하는 의도가 있어서이다. 인간이 가지는 애톳한 생각이나 마음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가? 이것은 우선 사물을 자아에서 구별하고자 하는 유, 무의식에서 유래 되었다.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는 것을 자아와 사물을 따로 구별하려는 의도에서 유래된 것이라면, 이를 관장하는 주체는 바로 생각이라고 하겠다. 사실 마음도 느낌으로 파생된다고 하지만, 결국은 그 느낌 조차도 생각이라는 감각 신경계를 거치면서 마음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는 추리를 해 본다면, 생각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실체라는 것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결국 인간의 자아와 존재는 생각의 형식과 색깔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고도 하겠다. 문제는 이러한 인간 개성을 나타내는 생각이 과연 의로운 것인가? 하는 데에 있다. 그렇다고 생각이 좋다 나쁘다의 관점으로 판단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 

그러나 인간이 신봉하는 생각의 발상 자체는 여기서 한 번 따지고 넘어 가고 싶은 마음이, 가을이라는 사물을 통해 바라 보면서, 불현듯 스쳐 지난 것이다. 

놀라웁게도, 노자의 도덕경에 이를 잘 지적하고 있다. 

노자는 사물의 경계를 지으려고 하는 의도에서 부터 인간의 참됨을 잃어 버녔다고 갈파하고 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로서의 의미에서 더 이상 벗어 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사물 하나 하나 자체가 소우주로서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고 그것이 진리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사물의 의미를 벗어 나지 않고 인정하는 것이, 사물과의 경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를 두고 있는 듯하다. 가을은 가을이지, 가을이 주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그 감동은 이미 가을이라는 사물의 경계를 벗어나는 자아에 의한 행위로 여겨진다는 것이 되겠다.

사물과의 경계를 지우는 주체는 바로 우리 인간이고, 인간은 생각으로서 이를 단정하고자 한다. 그러니, 사물과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는 비극의 주체는, 바로 생각이라는 매체가 된다. 그러니, 사물의 경계를 찾는 근본 인간의 잘못 길들여진 것은 모두가 생각이 그 원인이 되겠고, 우리들의 생각만큼이나 만물을 진리로부터 괴리시키는 원흉이 된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 

생각함으로 존재한다. 근본적으로 잘못 된 생각을 가진 인간을 거짓 인간이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 참 인간인가?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 참 인간이다.” 

생각으로 행하는 모든 인간의 행위가 인간에게는 업보로 남게 되니, 참 인간으로 세상에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기만 할 수도 있다. 참 인간의 진정한 상은, ‘말하면서도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들으면서도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움직이면서도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모순된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를 이룰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서는 몸을 깎는 수련의 행위적 노력을 추천하고 있다. 어쩌면 인간의 한계점을 목표로, 이를 극복하는 인간 승리의 진면목을 요구하는 듯하다. 

같은 인간으로서 매우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분적으로는 동조도 해 보고, 흉내도 내어 보겠지만, 필자의 부족한 인내력으로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경지 임이 불 보듯이 빤하다.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그냥 두 손을 놓고 바라만 보고, 행여나 이루어질 지도 모르는 요행을 기대해야 할까? 다행히, 게으런 필자와 같은 사람들도 초라하지만 명함을 내어 놓을 자리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라는 거룩하고도 고마운 아름다운 분이시다. 

“그의 이름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 되는 구원의 권세를 주신다”고 하셨다. 그분은 우리 대신에 우리가 받을 모든 고통을 대신 짊어 지시고 십자가에 보혈을 흘리셨다. 우리가 생각해야하는 선악과의 죄과를 다 가져 가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생각하는 헛 수고를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밖히신 예수님과 함께 나도 죽었으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나와 함께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바울의 진솔한 고백을 믿기만하면, 구태여 생각 하지 않는 극복하기 어려운 수고를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는 것 아닌가. 

그럼 누가 이 수고를 할 건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예수님의 부탁으로 친히 이 수고를 담당하시고 계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는 진리의 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생각으로 부터 완전히 분리해서, 자유하게 하신다. 더 이상 거짓 인생을 살지 않는, 회복된 참 인간으로 돌려 놓아서,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한다.

세상 만물, 모든 사물에 하나님의 형상을 담아 놓으셨다. 

생각으로 사물과 하나님으로부터 경계를 세웠던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되는 믿음으로 인해서, 이제 더 이상 사물과 구별되지 않는 완전한 하나가 되었다. 

“산은 산이요, 나도 산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물과 하나 되는, 

참 나를 비로소 회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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