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Style

무엇이 우리를 이끄는가?

인생에 목표가 있다는 것과 없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목표가 있다는 것은 멀리는 추구할 대상이 있다는 것과 가깝게는 대상을 향해 달려 가게할 나름대로의 바른 기준슬 세워야 한다. 예를 들어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최종 기착지는 진리가 되고, 그 과정은 진리 탐구가 되고 이에 따른 나름대로의 선택해서 수행하는 수단과 방법을 기준으로 정해서 정진해야 할 것이다.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오직 진리’라는 화두를 놓고, 그 외의 모든 곁가지는 단지 목표로 나아 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으로 여기고 제거해야 하는 것들이다. 공자는 이 목표를 ‘예’로 정하고 가르쳤다.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성숙한 단계를 ‘예’로 잡은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절에는 이를 아마도 ‘로고스’라고 한 것이겠지요. 인간의 이성을 지고의 존재로 여기고, 신이 아닌 인간 중심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 것이고, 공자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주쟝한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인간은 인간 고유의 소중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했고, 그것을 ‘인’이라고 설파했다. 한자로는 어질 ‘인’으로 뜻을 가지시만, 공자는 어질다는 의미 보다는, ‘인간 됨의 선한 씨앗’ 정도로 여기고 인간의 시작 점을 삼았다. 결국 인간은 각자가 갖고 있는 보편적 가치관인 ‘인’을 가지고, 서로 공감을 하면서 살고 있고,  성숙한 인간 지고의 목표를 ‘예’로 해서 노력하며 나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라고 하면 흔히 예의 범절이라고 여길 수 있는데, 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인에서 예로 나아가는 과정을 공자는 ‘효’라는 연결하는 다리를 제시한다. 효는 먼저 가까운 사람을 통하여 예를 실천하도록 하는 실질적인 수단으로 해서, 효를 가르치고 익혀서 바른 예의 성숙한 인간상을 이루도록 했다.

또한 효라는 것은 학습의 근본 이념으로 삼게 된다. 효는 배우고 몸에 익혀서 하나가 되게 한다. 논어에 학이시습지라는 유명한 귀절이 있다. 사실 이 귀절의 의미도 효를 실천하기 위한 수단으로 학습이라는 실천 수단을 제시한 것이다.

인에서 시작하여 효의 여무는 과정을 거쳐서 예라는 인간 지존의 성숙한 열매를 맺는 것을 인간의 소명으로 여긴 것이 공자의 이론이었다. 공자는 인간은 진리에 해당하는 ‘예’라는 궁극적인 목표에 다다르는 존재로 준비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에 반하여, 같은 시기에 공자 보다 20년을 앞서 태어난 노자는 ‘예’라는 고상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였다고 한다. 노지는 인간이 세운 지고한 기준이 세워지는 순간부터 권력이 되고, 또한 기준으로 인한 권력이 폭력으로 변한다고 했다. 

아무리 선한 뜻으로 시작한 의도라 할지라도, 규범이 되고 기준으로 세워지면, 결국은 죄의식과 피해의식을 동반하게 해서 억누르는 감정과 폭력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예를 들면, 한 가정에서 부모의 가치관은 영락없이 그 가정의 규범이 된다. 

어느 부모치고 자식들이 잘못 되기를 원하는 부모가 없듯이, 그들의 선한 행위로 인해서 모든 자식들이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실제로 나타나는 현상은 부모들에게 대항하고 부모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는 자식들이 태반이라는 사실이다. 부모가 기준을 세우는 순간부터, 자식들 입장에서는 폭력으로 받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노자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아무리 지고한 목표가 세워진다고 해도, 그 추구하는 목표로 인해서 깃발이 세어지면, 그 깃발로 인해서, 인간들을 줄을 세우게 하고, 편을 가르게 되어서 서로 배척해야 하는 비극적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통해서 본연의 인간성을 스스로 회복하고자 했지만, 노자는 이를 부인하고, 인간성의 회복은 이루어질 수 없는 진리에 연연하여 스스로 이루기 보다는 자연의 본질에 충실하게 적응하면서 물 흘러 가듯이 자연스럽게 살아야 된다는 주장이었다. 인위적으로 부자연 스럽게 긁어 부스럼 하지 말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면서 무위자연으로 도를 이루도록 하라는 뜻이다. 

도전도 하지 말고 도전도 받지 않으면, 자연은 스스로 이루어 간다는 것이고, 자연의 일부인 인간들도 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자연을 신으로 살짝 바꾸어 생각해 보면, 현대의 신을 중심으로한 기독교 사상이 노자에 가깝고, 인간 회복을 주장한 공자는 인본주의에 입각한 각종 철학과 더불어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불교와도 일맥 상통한다고 하겠다. 

허긴 엄밀히 말하면, 자연의 법칙을 신봉하는 노자나, 인본을 주장하는 공자나, 사실은 신을 신봉하는 것과는 다른 별개의 이론이라고 하겠다. 공자는 목표를 통해서 인간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에 반해서 노자는 목표는 무슨 얼어 죽을 목표냐, 괜스리 잘 난척하면서 쓰레기나 만들지 말고, 자연이나 환경에 순응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라 믿었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이룬다.” 

-노자-

과연 무엇이 우리를 이끌고 있는가? 

인간이냐?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냐?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신가? 

비록 연약한 인간이지만, 적어도 하나는 집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목표란 부족한 피조물인 인간이 지어낸 미래 지향적인 사항이지만, 창조주에게는 시제가 없기에 이미 한 찰라에 다 짜여져 이루어져 있는 완료 상태이니, 진정한 미래도 목표도 부질없는 사항이 된다는 사실이다. 

목표랴 인간이 이상향을 그리며, 설정하고 기준을 세워서 이루어 간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중도하차 하는 꼴이 되는 것이니, 길게 보면, 어쩌면 노자의 주장대로, 결국은 자연의 일부로 포함되어 순환되어 가는 것이 더 인간적인 해석이라고 하겠다.

인류가 발생된 이후, 수 많은 인간들의 목표가 세워졌지만,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고백한, “허사로다, 허사로다, 모든 것이 허사로다”의 독백이 인간의 목표가 부질없음을 잘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가 내린 결론대로, 인간의 애씀이 아니라, 창조주 여호와를 알고 순종하고 그와 함께 누리는 것만이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이리라. 하나님의 복음을 우리의 씨앗으로 할 때에,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는 수확을 걷으리라. 

무엇이 우리를 이끄는가? 

“하나님 사랑이 우리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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