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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시, 내 영혼의 그림, 내 영혼의 얼굴!

스칸디나비아 인인 뭉크의 그림을, 예사로 바라 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사는 북구의 거친 자연을 만나기 때문인가? 북극 지방의 휘황 찬란한 오로라를 만나고, 바다가 육지 깊숙히 파고들어서 어디까지가 바다이고, 어디가 산인지?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빙하의 잔재를 대하는 것 같은 신비한 푸른 빛과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뭉크는 프랑스의 화가, 반 고흐와 같은 부류의 화가로 느낌이 온다. 그래서 하늘을 표현하는 방법이나 색상이 정신 분열증을 겪은 사람들의 회오리가 있고, 불안감과 긴장감을 일으킨다. 얼굴 표정이 일그러져 있는 가운데, 공포와 외마디의 신음이 새어 나오는 듯한 인생 전반을 보여 주는 듯 하다. 

어쨌든, 뭉크의 작품은 고흐의 작품을 대할 때와 같은 예사롭지 않은 삶의 고달픔과 의지할 데 없이 끝없이 방황 하는 자화상을 연상하게 한다. 인생 살믜 주파수가 일치하니 자연히 감정의 파형이 증폭이 되어, 공감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필연이라고 하는가? 이러한 공감대는 후세에 뭇사람에게 전파가 되니, 그 보상이 따르지 않겠는가? 그의 작품 값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축에 든다고 한다.

고흐나 뭉크가 지금 살아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들의 작품 값에 수 없이 기절을 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으리라. 

사실 오늘의 주제는 뭉크도 고흐도 작품 값도 아니었다. 우연히 지하철 유리판에 찍힌 뭉크 전람회 광고를 위한 홍보 판에 쓰여진 ‘영혼의 시’라는 단어였다. ‘영혼의 언어’, ‘영혼의 그림’과 같은 언어적 표현에 매료하고 있는 평소의 필자의 관심 때문이 아니었는가? 생각 해 본다.

원래 필자의 의도는 ‘보편화 된 인간 영혼의 완전한 얼굴’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필자가 가진 모든 생각의 파편 쪼각을 모아 모아서, 마지막 점을 찍는 순간까지 인내를 가지고 달려 가는 것이었기에, 뭉크를 표현하는 ‘영혼의 시’라는 단어에 순간 필이 꼽히게 된 사유라고 하겠다.

‘영혼의 시’라는 언어적 표현을 받을 만한 사람이 뭉크가 아니겠는가? 이 보다 더 아름다운 언어는 세상에서 더 이상 찿을 수가 없으리라. 필자는 이래서 뭉크가 부럽다. 

누가 나의 영혼을 ‘시’라고  표현해 줄거나? 

이 밤, 뭉크가 더욱 뭉클하고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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