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의 생명을 준비하는 인생!
인생을 한자로 풀이하면, 생명이 있는 사람, 살아 있는 사람, 정도로 해석한다.
이에 반해 고인이나 망인이라고 해서, 죽은 사람 내지는 생명이 끊긴 사람을 이른다.
살아 있는 사람이건, 죽은 사람이건, 죽음의 관점에서 바라 보면, 매 일반인데, 구태여 이렇게 구별하여 부르는 것은 아마도 ‘생명’이라는 요소가 개입되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죽은 망자는 말이 없지만, 살아 있는 인생은 이렇게 말도 많고, 하고자 하는 이야도 길다. 그래서 인생은 아름답다고 한다.
희로애락의 감정이 살아 있는 사람을 인생이라고 표현한다면, 생명이란 아마도 이런 애톳한 감정으로 장식된 집 안의 가구에 비유해서, 텅비고 휑한 회색의 집을 죽은 생명으로, 그리고 아름다운 가구로 채워진 핑크색 집을 살아 있는 생명인 인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인생은 아름답고, 말도 많고, 꾸밈도 많고, 스토리도 화려하고 다양한 것일게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은 인생과 망자의 갈림 길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인생의 화려한 길과 망인의 꾸밈없는 소박한 선택의 기로에서서, 삶과 죽음에 대한 비교의 회한을 감당해야 하리라.
화려한 인생을 자랑하면서 산 사람 일수록, 망자의 길로 들어가기가 그다지 달갑지않을 것은, 삶의 자랑 만큼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집착이 더 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랑을 포기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망자로의 길이 그리 평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가 걸치고 있던 인생의 화려했던 생명의 옷을 벗고, 쉬이 망자의 광야로 들어 가고자 하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인생의 포기란 망자의 길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처신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인생을 포기한다는 의미는 자살하는 것의 의미가 아니라, 자기가 섬기는 세상의 우상, 즉 이생의 자랑이나, 영육 간의 정육을 의미해야 한다.
한 편으로는, 어차피 영원한 죽음에 비하면, 우리의 일생은 무한한 우주에 찍힌 한 점에 지나지 않을 것임으로, 포기라는 수동적 대처 보다는 차라리, 한 점 인생의 오점을 인정하고, 망자의 길로 기꺼이 달려가는 능동적 자세가 더욱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인생과 망자를 구별하는 기준을 생명이라는 요소로 잡는다고 여기고 있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인생 안에 머무는 사람들의 협소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의 본질은 영원성에 있다. 그렇다면 생명이란,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해야만 한다.
이에 우리가 생각하는 잠정적인 인생이란, 사실은 살아 있는게 아니라, 죽은 생명이요, 이에 반해서 영원한 망자의 죽음의 삶이야말로 참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이유로 해서, 가끔은 냄비물 끓듯, 희로애락하는 인생 여정에서 잠시 물러나서 관조할 수 있는 생의 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요즈음에 와서 더욱 간절히 느끼는 것은, 눈 뜨고 보고 있는 이 세상이 정말로 미쳐서 돌아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지구가 태양계의 공전 궤도를 벗어나 방향성을 잃고, 한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 가는 것 같은 형상을 띠고 있다.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이지 못해서 살고, 죽고 싶어서 사는 것 같다.
추락하는 지구호와 같이 인생을, 삶의 의미를 잃어 버린 인간 군상들이, 망자의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기는 커녕, 잠시 스쳐 지나가는 소중한 인생 삶마저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죽어가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