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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할 수 없는 우리들의 실수?

왜,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든가? 

불교에서도 ‘제행무상’이요, ‘제법무아’라고 하지 않았던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나의 자아도 고정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를 깨닫지 못하는 중생들이 스스로 덕을 쌓아 실천하지 못한 연유가 아니겠는가? 세상의 이치가 변하는 데도, 자기가 우주의 중심인 양, 자기 자리에 못을 박고 움직이지 않으려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는가? 

어느 페친께서도, 나폴레옹이 마지막 워터루 전쟁에서 패배한 것도, 과거의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고리타분한 전략을 바꾸지 못하고 전투에 임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상황 변화에 임기 웅변으로 대처하지 못한 채, 나태한 인간의 모습이 결국은 실수를 반복하게 방임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오늘 아침 조간 신문에 훈민정음과 MS 워드에 집착하고 있는 삼성전자 사내 분위기와 집단 지성과 오픈 이노베이션으로 인터넷  시대의 새 가치를 담은 ‘독스’를 회사 내의 소통 수단으로 사용하는 구글사 분위기를 들어서,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집단인 대한민국이 나아 갈 미래의 길을 걱정하는 좋은 글을 보았다. 

관리와 비밀주의에 익숙한 국내 대기업이 어떻게 탈 하드워어 전략을 세워서, 인터넷 시대의 신문명인 소프트 파워의 협업 문화를 신장할 수 있겠는가? 하는 안타까움을 토로한 내용으로 대한민국의 반복되는 실수의 역사를 걷어 차고 세계에 우뚝 설 수 있기 위해서는, 오래동안 몸에 배어있는 나태한 일상의 작은 습관부터 조금씩 바꿔 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변화를 상고하는 면에서는, 이렇듯 실패를 반복하는 근본 원인으로 인간의 나태함과 교만함을 들 수 있는데, 이 두 단어는 서로 동질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게으르니까, 변화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요, 이를 정당화 하려니, 교만한 자세를 고집하고 견지하는 것이다. 

불교의 원리인 삼법 중에 마지막이 ‘일체개고’가 아닌가?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평범한 원리를 깨닫는 덕을 쌓지 못하면, 필히 겪어야 하는 악연의 결과로 결국 세상 사는 것이 고통으로 돌아 오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처지를 맞이한다는 설명이다. 

누구의 예를 들어 보면, 이를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바닷물로 갈증을 풀려는 노력을 하는 인간상으로 묘사했다. 바닷물로 갈증을 푸는 악순환 속에 사는 변하하지 못하는 인간의 고달픈 삶은 고행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인간이 실수를 반복하는 이유는 결국 변화에 익숙지 못하는 인간의 고정 관념으로 부터 유래되는 것이고, 이를 탈피하는 방법은 고정하려는 자신의 게으름과 교만한 ‘나’라는 자아의 존재를 끊임없이 부인하고, 자연의 변화 섭리에 충실하게 창의와 혁신의 자세로 적응해 나가야 하리라. 

불교에서는 이러한 자연의 섭리에 적응해 가는 과정 모두가 우연이 아니라,  나와 남과의 인연으로 엮어져 있어서 나와 타인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고, 그래서 자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근본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의 마음, 사랑으로 연관지어 볼 수 있겠다. 

불교는 인간이 중심이 된 깨달음의 에끼스인 자비로 행하고자 하는 것이고, 기독교는 인간의 불완전한 것을 철저히 인정하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론 속에서 하나님 은혜의 결과로 감사하며, 하나님 사랑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아멘으로 순종의 행위를 실천하는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 둘 다 자기를 부인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 하지만, 그 근본 원인을 기독교가 주장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째 계명으로 인해 서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결국 이러한 이견 아닌 이견도 늘상 범하는 반복되는 인간의 실수와 같은 것 아니겠는가? 

이런 실패인 경우에는 어떻게 실수의 악순환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가? 

솔로몬에게 가서 물어 보랴? 부처께 가서 물어 보랴?

이에 대한 답은 오직 하나님만 아시리라!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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