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진리의 숫자, 여호와 하나님 이름!
2014 년 세계 수학자 대회가 코 앞에 다가왔다. 또 교황서하께서 한국을 방문하신다고 해서 오늘 11일부터 광화문 일대를 정비한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국운의 기상이 이제 하늘을 찌르고 땅을 뚫어서, 남북통일이 이루어지고, 명실공히 동북아 시대의 세계 중심이 되는 기적의 역사가 성취 되기를 기원해 본다.
수학은 고대 이집트 나일강의 범람으로 인해, 국민들로 부터 세금을 거두어 들일 목적으로 홍수 후에 달라진 나일강변의 지형을 정확하게 측량해서 수확한 밀에 대한 세금 부과를 시행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수학의 시조는 세금 징수원인 Tax Collector가 아니었는가 짐작을 해 본다.
텍스 콜렉트라고 하면, 성경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었지만, 로마를 대신해서 식민지 이스라엘 자국민들에게 부과된 일정량을 거두어 드리는 일을 맡은 자들로 과중한 혈세를 부과하는 바람에 가장 미움 받는 자들에 속했다. 대표적인 세금 징수원으로서 삭개오가 있었고, 또한 마태복음서를 쓴 마테가 있었다.
둘 다 예수님을 만나서, 집으로 초청해서 예수님을 융숭히 대접하고, 삭개오는 개가천선해서 회개하고, 자기의 재산을 나눠 주면서 예수님으로 부터 구원 받은 자로 성경에 묘사가 된다. 그리고 마태도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여 신약의 첫 부분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예수님의 창녀와 세리에 대한 애정은 특별나서, 주요한 가르침을 이들 두 부류들에게 많이 할애해서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창녀는 몸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가장 낮은 단계의 여인들이었고, 세리는 같은 민족을 등쳐서 로마인들에게 뺏은 재산을 바치는 그야말로 남자 세계에서는 가장 미움과 손가락질을 받고 살아야 하는 자들의 대표적인 상징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이들과 가깝게 지내시면서, 가깝게 지내신 이유는 아마도 이들의 행음하고 남에게 강권하는 모습이 우리 근본 죄인된 인간들의 진짜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더 이상 감추일 것도, 외식할 것도 없는 인간 본연의 솔직한 모습이기에, 더 이상 회개하라, 말라고 할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미 그들은 자신들이 지켜야할 자존심도, 거짓으로 회칠하고 가식해야 할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육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장 천하고 낮은 곳에 처한 문둥병자와 같은 자들이었기에, 이들을 향한 산상보훈의 가르침에도 가장 먼저 언급이 되지 않는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이라. 애통하는 자,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늘의 위로를 받을 것이라.” 창녀와 세리들이야 말로 심령이 메마른 자들이었고,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고, 인간 이하로 천대 받았던 애통한 자들이 아니었겠는가? 그래서 천국이요 하늘이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천국을 경험하게 하고, 위로를 하신 것이리라.
수학을 이야기 하려다가 갑자기 삼천포로 빠졌나 보다, 다시 삼천포를 돌아 나와서 수학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이후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를 만드는 대규모 공사를 수행할 정도로 수학의 힘을 이용하였고, 수학을 통해서 자연과 만물을 주관하는 위대한 신에 대한 기하학적인 섭리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고대 희랍 시대에 와서는 석가와 공자와 같은 시대인 기원전 5세기 즈음에 걸출한 인물인 피타고라스가 이집트와 바벨론으로의 오랜 여행을 통해서 수학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지금까지 피타고라스 정리라는 위대한 수학 이론을 정립하게 되었다. 물론 수학의 원조라고 하면 피타고라스와 함께 기하학의 원조인 유크리드를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은 그가 표톨로마이어스 왕의 개인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지은 수학 원리라는 책이다.
점을 정리하고 이 점을 기준으로 선을 이어 가고, 정리로 증명되지 않는 여러 이론인 공리를 이용해서 수학이라는 건축물을 엄정한 논리라는 단계를 거쳐서 수학의 금자탑을 차곡 차곡 세우게 했다. 당시에는 로고스인 논리를 통한 수학을 진리라고 했고, 수학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겠다.
이후 세계적인 저서는 모두가 유크리드의 원리라는 책의 논리를 따라서 대작들이 쓰여졌다고 하니, 유클리드의 공적은 그야말로 서양 논리의 원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타고라스는 이후 희랍에서는 피타고라스 학파가 성횡했고, 수학이야 말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에 대한 근본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동안 희랍에서 우주의 근본 구성인자가 물질이라고 하여 물, 불과 공기에 대한 탐구가 유행하고 있을 때, 감히 수학이야말로 우주의 근본이라고 주장해서 수학이 비단 인간의 편리한 도구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구성하는 정신의 근본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우주가 정수의 비율로 구성되었기에 아름답다고도 했다. 당시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제자였던 히파수스가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게 된 것은 피타고라스 정리에서 나타나는 직각을 끼고 있는 두 변의 값이 1인 경우에 정수가 아닌 무한대 값으로 발산하는 무리수인 루터 2의 값인 새로운 수의 세계를 보게 된 것이었다.
그는 결국 비밀 조직과도 같았던 피타고라스 학파의 동료로 부터 바다로 내던져서 죽음을 당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제나 지금이나 인간들의 행태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신성해야 할 종교 집단이나 학문 집단에서도 여전히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이데아는 늘 이렇게 핍박 받고 순교를 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화두인 창의와 혁신은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게으런 인간 집단에 대한 대반격의 의미를 가진다고도 할 수 있다. 사회의 기득권 집단을 물리치는 것이 창의와 혁신의 주요 콘텐츠가 되어야 하리라.
이후, 수학은 인도로 건너와서 정신적인 면에서 기하학이 아닌 숫자, 본연의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기원 후, 5세기 경에 천문학자인 굽타가 0 이라는 숫자를 처음 도입하게 해서, 없음의 의미로 사용하지만, 이를 수없이 반복하게 되면 무한대의 의미를 가지는 수를 표시하게 되었고, 비로소 방정식의 해를 얻을 수 있는 계기도 마련 되었다고 한다.
이 수의 개념은 아라비아로 가서, 유럽으로 다시 건너가면서 지금의 아라비아 숫자로 일반화 되었다고 하지만, 서양에서 인도의 영의 의미를 이해하기 까지 800년이 걸렸다고 하니, 얼마나 인도의 정신력이 위대한 것인가를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중국은 음수를 발견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오늘 이 아침에 어느 폐친께서 마하트마 간디의 무저항 주의에 대한 내용을 실었다. 왜 인도는 이런 세계적인 정신적 지주를 탄생 시켰을까? 하는 화두를 던졌다. 왜 그는 진리의 중심인 기독교 신자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는 비록 예수가 진리인 것을 발견 못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대 인도인들로 부터 고고하게 내려 온 추상적인 수학의 진리를 깨달은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는 자로서 영원을 향한 깨달음의 기쁨을 누린 자가 아니었는가 하는 짐작을 해 본다.
진리란 숫자 “0” 과 같은 것이 아닐까? 가장 크면서 가장 작은 자. 모든 것을 포함하면서도 가장 겸손하신 분, 무소부재하시면서 전지전능 하신 분, 근본 하나님이시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한 이름이 바로 “0” 이 아닌가 생각 되어진다. “0”, 여호와 하나님 이름이다!
♡안응 곽계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