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서 행해야 하는 가장 근원적인 것, 낮은 곳에 임하라!
(새벽과 저녁의 예불 후에 반드시 암송하는 경이 있으니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이다. ‘위대한 지혜의 삶에 대한 핵심적 가르침’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데, 흔히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고도 표현한다. ‘반야(般若)’는 인도의 말을 소리대로 옮긴 것으로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되는 지혜’ ‘존재의 진실을 아는 초월적 지혜’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다.
이 반야에 대한 가르침은 불교의 중심축을 이룬다고 할 만큼 중요한 것이며
경전의 양도 방대하다. 한국불교계에서 가장 중시하고 또 좋아하는 경(經) 중에 하나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인데, 이것의 600배나 되는 반야부경전도 있다. 『반야심경』은 이 모든 경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반야심경』이 아주 짧은 경전이긴 하지만, 언어적인 풀이와 학술적인
분석 및 교리의 해석까지 하려면 한 권의 책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가르침의 핵심만을 짚어보기로 한다.
<최고의 지혜에 이르렀다고 하는 관자재보살은 깊은 지혜의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몸과 정신작용이 모두가 고정적 실체가 없음(空)을 밝게 비춰 보고 모든 괴로움과 재앙으로부터 벗어났다. 지혜로운 이는 들어라(舍利子–지혜제일인 제자).
우리의 몸과 마음이라고 일컬어지는 것(五蘊–色受想行識)도 무한히 변해가면서 그때그때 일시적인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이 무한변화(空) 가운데는 나고 죽음에 대한 괴로움, 더럽고 깨끗함의 분별과 논쟁, 얻고 잃음에 대한 기쁨과 슬픔 따위가 존재할 수 없다.
무한변화인 공(空)에는 고정적 실체로서의 몸과 정신작용이라고 할 것이 없고, 고정적 실체로서의 여섯 가지 인식기관(눈, 귀, 코, 입, 살갗, 마음)이라고 것도 없으며, 고정적 실체로서의 여섯 가지 대상(색, 소리, 향, 맛, 감촉, 이치)이라고 할 것이 없고, 고정적 실체로서의 여섯 가지 인식의 경계(앞의 기관과 대상이 만나 만들어지는 경계)라고 할 것도 없으며, 고정적 실체로서의 괴로움과 윤회의 열두 가지 연결고리라고 일컬을 것(12因緣–근본 번뇌로부터 생로병사와 고뇌까지)이 없고,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정리되고 고정적인 지혜도 없으며(無智), 밖에서 얻을 수 있는 영원한 평화도 없다(無得)
밖에서 얻을 수 없기에 보살행을 하는 이는 깨어있는 삶을 사는 것이며, 그로인해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니 두려움도 없고, 세상에 대한 그릇된 판단도 하지 않게 되어 한결같은 평화에 이르며, 모든 부처님들도 바로 이 깊은 지혜의 삶으로 인해 최고의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지혜의 삶을 살라’고 하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하고 밝으며 위대하고 견주기 어려운 핵심적 가르침으로서 모든 괴로움을 제거하는 진리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지혜로운 삶의 요체를 밝힌다. ‘가세 가세 건너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 깨달음 이루세!(이 부분은 여러 가지 번역이 가능함)’ >
스님들은 법당의 오른쪽이나 왼쪽에 봉안된 ‘화엄성중탱화(華嚴聖衆幀畵)’ 또는 ‘신중탱화(神衆幀畵)’를 향해 이 『반야심경』을 암송한다.
불교에는 무수히 많은 신이 있다. 창조신인 범천(梵天)을 비롯해 우리가 아는 모든 신이 호법신(護法神)에 속한다. 이 호법신들이 법당의 중앙이 아니라 좌우에 모셔져 있는 것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부처님의 설법인데, 『반야심경』을 암송해 줌으로써 그들의 수고를 칭찬해 주는 것이며, 또한 그들도 언젠가 깨달아야 할 존재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상징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바로 그 호법대중(護法大衆)에 속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유지하고 전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석송암 스님–
공(空)과 무지(無智)와 무득(無得)의 정의가 잘 정리되어 있어서 좋았습니다.
모두가 평생을 두고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소중한 근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침에 다시 지나 간 소중한 글을 다시 대해 봅니다.
존재의 진실을 아는 최고의 지혜인 반야심경을 터득한 관자재보살의 이야기.
공(空)이라는 무한변화(無限變化) 되는 개념을 통해 몸과 마음의 정신 작용을 영원과 하나가 되게 다스리는 깨달음을 터득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마음에 와
닫는 내용이었습니다.
무지(無智)와 무득(無得), 고정된 틀이 없기에, ‘영원을 지향하는 지혜’도
“영원을 보장하는 어떤 대상에 대한 보상 기대도 할 것이 없다”는
가르침도 소중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스스로 영원히 살아 갈 수 없다”는 진실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자기 성찰(省察)을 했을 때, ‘영원이라는 진실’, 즉 절대 진리를
비로소 만날 수 있다는 역설적 가르침이 아닌가 합니다.
자기의 바람을 절대 절망 가운데서 철저히 부인하는 경지가 아름다운
자기 성찰의 경지가 되겠지요.
바울사도가 고백한 인간적인 가르침이 생각납니다.
‘네가 선줄로 생각할 때, 넘어질까 두려워하라!’
이는 수행자가 늘 깨어서 행해야 하는 가장 근원적인 것,
즉 교만하지 않고 가장 낮은 곳에 처신해야 하는 겸손한 자세이겠지요.
(좋은 살핌입니다. 전문적으로 들어가자면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건 최후의 문제니까요. 아주 좋습니다.)
사실 ‘안다‘는 문제는 늘 우리가 넘어야할 ‘행한다‘라는 마지막 수행의
관문이 기다린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지요.
깨달으면 행동하고 행동하면 습관이 되고 좋은 습관은 좋은 인격이라는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 있지만, 어디 열매 맺는 수행(?)이 쉽게 이루어
지겠습니까?
성경에는 인간 스스로가 의지적으로 결단을 내리고 수행 해야겠지만,
결국은 생명이 사망을 집어 삼키도록 능력의 성령이 은혜로 인도하게,
믿고 순종하는 것으로 맺어진다는 성령의 열매론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최고의 지성 철학인이었던 관자제보살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반야심경을 낭송하는 것은 아닌지요?
(마지막 말씀은 불교적이지 않습니다.
불교의 신행에 성현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반야심경에서는 수행했을 때 괴로움을 넘어선 표본으로서 관자재보살을 등장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은 누구의 도움을 요청하는 성격이 전혀 없답니다. 앞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한 부분이 바로 이런 점이었습니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해석을 하시다보니 생기는 차이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