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傳道)는 한 사람의 온전한 생명을 양육하는 과정!
[(뒤집어 생각하기: 전도보다 중요한 것)
교회에서 때때로 “우리는 사람들을 교회로 전도해야 합니다!” 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전도하라’는 목표보다 더 중요한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그 몇 가지에 대해서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첫째, 그 전도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먼저 솔선수범으로 전도를 하면 됩니다.
둘째, 오고 싶은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의 성도들에게 사회 속에서 “왜 전도를 하기를 꺼리느냐?”
의 질문하면, 대부분은 “친구와 동료를 교회에 데리고 왔을 때,
내가 다니는 교회에 잘 적응하고 만족해할까?”를 고민합니다.
일부분들은 이런 비판들을 하실 겁니다. “교회는 사람을 보고
오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러오는 곳이다.”,”교회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자기방어는 더욱 전도당하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긴다는 것을요. 저러한 방어는 핑계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고 싶은 교회,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를 할때 “와 보라!”했던 것처럼 “우리
교회에 한번 와서 보라”고 자랑할 수 있을 정도로 공동체가
내게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전도는 한 개인이 하는
것보다 공동체 전체가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진짜 중요한 것은 전도하는 사람의 ‘운신의 폭’이 넓고
‘폭넓은 사고’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예를 들면 더
빠르겠군요. 저는 예전에 한 공동체의 ‘전도축제’ 예배에
몇몇의 사람을 모시고 간적이 있습니다. 그 전도 축제를
준비했던 사람들은 6개월가량을 준비했다고
하네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전도 축제를 준비하신 분들이
전도되어온 사람들을 향한 ‘숨겨진 선입견’을 가지고 있더군요.
‘저 사람이 데리고 온 사람은 나보다 똑똑할 거야!’, ‘저 사람은
내가 커버하기엔 힘이 들겠지’, ‘저 분은 왜 교회에 온 것일까?’
등등.
전도하자고 외쳤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결국 먼저 해결되어져야
할 것들은 복음에 대한 확실성과 모든 이를 긍휼과 사랑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은 늘 자신과 상대방을 비교하는
‘자존감의 비약’부터 사라져야 시작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님이 교회에 전도되어 온다고 생각해볼 때 과연
그 사람이 부처를 섬겼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품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님의 말 빨과 사고를 이길 수 없는 ‘자기
자신’때문에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존 교회 안에서 있는 사람들의 자존감의 비약을
전도당한 사람은 기가 막히게 느낍니다.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 상처로 느끼는 것이지요.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각 개인이 좀 더 넓은 마음과 사랑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운신의 폭’이 넓은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전도하라’는 표어보다 더 중요한 세 가지가 바로 이것
입니다. 제 말이 어렵나요? 부디,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민우 님-
전도를 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전도하자고 외쳤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결국 먼저 해결되어져야 할 것들은 복음에 대한
확실성과 모든 이를 긍휼과 사랑으로 볼 수 있는 마음,
즉 “운신의 폭이 넓은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매우 좋습니다.
그리고 상대방과 비교 판단하여 저지르는 자존감의 비약으로
인한 열등감을 해소하지 못 하는 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
들이나 불신자들을 교회로 인도하여 전도의 열매를 맺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말씀은 너무나 귀한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아마도 요사이 교회 전도 열매가 맺지 못하고 있는 여러
교회의 상황을 보시고 하신 답답한 심정을 나타낸 글로
여겨집니다.그러나 복음의 전도는 하나님의 지상 명령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도 계속 되어야 하는 것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 할지라도 기필코 복음의 문은
열려지고 확장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복음 전도를 하기 위해서는 복음 내용을 담고 있는
성경 66권에 대해서 통전적인 이해가 기초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었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뒤에 성령 강림 사건 이후부터 복음전도 사업인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을 통해서 비로소 예수님의 복음전도가
재현된 것이지요.
말씀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성령님의 내재하심으로 인해서,
비로소 복음전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님이 주장하시는 전도의 표어
보다,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성도들이 먼저 포용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을 가져야한다는 말씀에 100%
동감을 하는 바입니다.
결국 운신의 폭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
하는 데에 주제의 초점을 맞추어 져야 하겠지요.
이 해답은 성경의 신구약에 제자훈련의 주제로 잘 집약되어 있습니다.
‘자녀 됨의 훈련’, ‘일꾼으로서의 사명자 훈련’,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차올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상정부를 통치할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지도력을 훈련’하는 것이겠지요.
구약은 이를 위한 좋은 학습도감(學習圖鑑)입니다.
더불어 ‘사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삼년 반의 공생애 동안의
발자취를 통해서 구체적인 천국정부(天國政府)가 지상정부
(地上政府)를 통치하는 모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공생애 일 년 동안은 자녀 됨의 훈련, 그리고 이후에 고된
시험을 통과하면서 일꾼으로서 영적 싸움을 준비하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일일이 열거하시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한 사건 사건이 그저 기적의 사건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장차 올 새 예루살렘에서 왕다운 제사장으로서
다스릴 수 있도록 치밀하게 계획되어 제자들로 훈련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일이었음을 볼 수 있는 안목을 내재된
성령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전도는 곧 성경 66권의 사건을 통해서 어떻게 제자가 되는가를
알고 심비에 새긴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한 사람들이 또 다른
제자 양성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 군사로 거듭나게 하는 과정일
것입니다.
전도는 거저 일어나는 붕어빵 기계틀이 아니겠지요.
전도는 한 사람의 온 우주를 품에 품을 수 있는 예수님을
양육하고, 재건축하는 소중한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
헌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