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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복(福)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하나님은 약하고 가난하고 낮은 사람들을 자주 들어 쓰셨다.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예루살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게 하지 않으셨을까?

그분이 명문가에서 태어나 공회원(산헤드린 최고 회의 의원)이 되어

동료 공회원들을 전도했다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우리 생각엔 그럴듯해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예수님을 이름 없는 촌 동네 나사렛의 가난한 여인에게서

나게 하셨고 비천한 목자들에게 먼저 그 소식을 알리셨다.

예수님은 갈릴리의 낮고 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셨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높고 귀하고 강한 데서 시작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인간적인 힘, 세상적인 힘을 의지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교만에 빠진다. 교만에 빠진 사람은 구제할 방법이 없다.

7세기 시리아 수사 존 클리마쿠스는

“탐욕은 사람이 치유할 수 있고 악의는 천사가 치유할 수 있다.

하지만 교만은 하나님밖에 치료할 수 없다”라고 했다.

반면, 낮고 천하고 약한 데서 시작하면 하나님 외엔 믿을 대상이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이루고 나면 우리는 더욱 겸손해진다.

그 일을 이루신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납득되지 않던 말씀이 실천을 통해 진리로 확인되면

우리는 자신의 무지함을 확인하고 다시 한 번 낮아질 수 있다.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김영봉] -정해근 님 인용-

‘심령이 가난한 것’이 팔복의 첫 번째 강령이었지요.

하나님 자신이신 천국이 저희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이 애통하는 자였지요. 반드시 하나님이신 위로를 만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복(福)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산상수훈에서 처음

가르치신 대로 세상의 복과는 완전히 다른 하늘의 복을 소개해

주셨지요.세상의 복을 추구하고 소유한 자는 절대로 하늘의 복을

얻기 위한 축복의 문이 허락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교만에 어두워진

소경의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소경이 아니었다면, 하늘의 복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이겠지만, 가증하게도 가까이 있는 세상 복을 탐한

나머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스스로 감는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예수님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소유한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그리고 또 이렇게 그들의 모습을 그려 줍니다.

“너희가 소경 이었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을 너희가 본다하니,

너희는 죄인이니라!“ 부자는 이렇게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는 것

보다 더 힘이 드는가봅니다.

그러나 아직도 입으로만 심령이 가난하다 하지 내심은 여전히

세상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자 여기저기를 두루 살피고 있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돌아봅니다. 눈을 반쯤 감은 소경이랍니다.

온전한 소경도 못 되는 엉터리 장애인(障碍人)이랍니다.

내가 눈으로는 하나님을 바란다고 하면서 손으로는 가증한 세상의

부(富)를 추구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서,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고 외치지만, 틈만 있으면 몰래

뒤로 가서는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을 서슴치 않는 죄인 중에 죄인이겠지요.

진정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오늘도 성령님의

가르침에 무릎 꿇고 나아가고자 합니다.

틈마다 돌아 서서 예수님께 침 뱉지 않도록, 깨어서 예수 보혈로

틈을 채워 주시기를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깨어서 기도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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