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으면, 수많은 알곡을 맺는다!
모두들 재미있는 캠프를 즐기셨는지?
삼분짜리, 일분짜리 자기 소개서 작성하시고 다음 시간에
훈련해 보는 것으로 합시다.
[네! 교수님 확인하고 살펴보겠습니다!] -이경렬 님-
아침 시간에 우리가 논의한 주제(부자와 가난한 자가 과연 공평하게
경쟁구도를 이룬다고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나름대로의 결론을
방금 페이스 북에 따로 올렸답니다. 모두 살펴보기 바랍니다.
제목은 “우리가 무엇으로 ‘호모 심비우스’를 실현 할 수 있을까?” 입니다.
답은 우리가 인간의 진정한 가치, 자신의 존엄성과 자존감을 깨닫고
이해할 때, 상황을 뛰어넘는 능력자로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경계를
스스로 뛰어 넘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아야한다는 전제가 필수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분명히 요령(기술: 技術)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이 “내가 누구이고,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인문: 人文)을 알아야 하겠지요. 둘 다 하나로 해서
이해하자고 하는 주장이 바로 최재천 교수가 주장하는 통섭(通涉)
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근본을 이야기하는 인문의 본질이 인간성 회복이고 이가 바로
인간의 진정한 가치, 즉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감을 깨닫고 가지는
것입니다?
[교수님, 팀원들이 각자 더 깊게 생각해보고 다음 모임에서 논제와
자기소개를 같이 토론 할 수 있는 자리를 근시일 내에 마련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았으면, 이제는 부(富)와 가난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고민해 보는 것이 수순이 되겠지요.
세상 만물의 이치는 모두가 자연의 이치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고,
자연의 이치는 진리의 이치요 생명의 이치를 근본으로 하고 있지요.
자연의 이치는 변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지요. 모든 것이 찰라와 찰라의 순간의
연속입니다. 변화의 연속적인 운동은 생명의 속성이고 이를 흐름의
운동(Flow)이라고 하지요. 모든 생명은 흘러 가야합니다. 흐르지 않는
것은 죽은 생명이 됩니다. 살아 있는 생명은 흘러가야 합니다.
그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시다.
부와 가난도 생명화(生命化) 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흘러 보내어야
합니다. 생명력이 넘치는 것을 부라고 하면, 생명력이 떨어지는 것이
가난이라 하면, 부의 생명에서 가난의 생명으로 흐르게 되겠지요.
흐름은 부와 가난을 조정하여 평행하게 하여 조화되게 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겠지요. 결국은 부도 흘러 보내고 가난도 흘러 보내서
자연의 이치를 만족시키는 것이 참 부와 참 가난의 의미가 되겠지요.
흐름을 세상 말로 표현하면, 나눈다는 표현이 되고, 세상 생명의
이치가 실현되어 조화를 이루게 되면, 자연히 풍성한 수확을
모두가 함께 누리게 됩니다.
무엇이 부(富)를 부 되게 하는가?
부를 흘러 보내어 서로 나누는 것이지요. 무엇이 가난을 가난 되게
의미를 부여할까요? 당신의 아픔, 궁핍함, 여러 어려운 환경을 자기
안에 가두어서 끙끙 앓거나 원망과 불만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부와 마찬가지로 흘러 보내어 이웃과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함께 하는 사회, 하나 되는 이상향(理想鄕)의
사회가 되겠지요. 비록 이상향을 지금은 이루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이상향을 향한 발걸음을 게을리
하면 안 되겠지요.
비록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 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결국은 승리
한다는 믿음위에 담대히 나아가면, 진리의 영을 만나게 되고
그때는 모든 것을 넘어가는 진정한 행복의 경지를 가지는 주인이
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으면, 수많은 알곡을 맺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있지요. 이것이 진정한 흐름의 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