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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만남(II)!

[(마음의 주인)

마음을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

마음의 세계는 ‘생각’으로 창조되고 ‘기억’으로 유지되는 ‘환상의 세계’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마음이다. 마음이 일어날 때 그 마음을

따라가지 아니하면 마음은 스스로 없어진다.

마음과 생각에 있을 때 우리는 현재에 있지 않고 과거나 미래에 있다.

‘마음의 주인’은 항상 지금 현재에 존재하는 자다.

‘마음의 주시’는 생각이 마음을 붙들 수 없게 한다. 생각을 지나가게 하라!

길옆에 서서 지나가는 차를 바라보듯 ‘관조’하라. 집착하지 않고 ‘주시’하면

모든 생각이 사라진다. 왜냐면 생각은 우리가 ‘에너지’를 주어야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에 에너지 공급을 중단시키는 것 그것이 ‘관조’ ‘주시’ ‘바라봄’의

비밀이다. 그 후 ‘나는 누구인가? 탐구하라! 이는 마음을 ‘진정한 나’

안에 붙들어 두며 종국 ‘깨닫게’ 한다. 그가 ‘마음의 주인’된 자다!]

-영성 님-

[마음을 따라가지 말고 마음을 주시하라! 재미있고 의미 있는 표현

인데요. 그러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Younghoi Jeong 님-

[마음을 ‘십지가’로 관조하며 ‘예수 안의 나’를 찾는 방법을

‘일반 영성’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이 깊은 영성으로 나아가는 길이죠! 그것이 묵상기도로

이어지면 우리의 내면이 업그레이드 될 수 있지요!]  

-Younghoi Jeong 님-

[생각에 에너지를 준다는 표현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네요.]

-마경훈 님-

[생각은 원래 허상인데 우리가 힘을 줘 이제는 그 힘에 끌려가는

것이죠! 십자가 진리로 거짓과 허상을 바라보고 서있으면 연기처럼

속살을 보이지요!]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만 일념으로 탐구할 때,

내 마음의 세계는 하나님 말씀으로 건축된 하나님 마음의 세계, 즉

하나님 성품으로 변해서 진정한 자아를 찾게 되는 것이겠지요!

천주교의 오랜 역사를 통해서 많은 영성 자료가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서 축적되고 정리되고 되어 있을 텐데, 그것들과 무엇이 다른지요?

[가톨릭은 동양영성을 많이 수용, 하나님에게 적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의 핵심을 놓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을 닦고 비우고 버리고 하는 것이 이름만 다르지 타종교와

뭐가 다를 것이 있습니까? 기독교의 영성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준 것입니다. 나를 버리고 예수를 닮거나

십자가를 내가 지는 것이 아닙니다.(이하생략)

저는 영성가이며 영의 해부학자입니다.

이를 위해 6개의 신학(프린스턴 뉴욕 신학등)과 20년의 영성이론 속에

갇혀있다 생명을 걸고 7년을 자신을 실험대에 올려 수도사적 삶 후에

현실로 나온 사람입니다. 이것이 진리고 이것밖에 우리의 살 길은 없다

보는 사람입니다.]

아멘! 너무나 흥미롭습니다.

평생을 현실 속에 살다, 현실 속에서 그동안 살아 온 삶 속에서

경험한 것들을 비추어서, 지난 7년 동안 영성에만 집중하면서

나름대로의 영성의 길을 걸어오면서 영성의 대중화 작업을 개척해

온 셈이었지요.

방법은 다르겠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독창적인 방법으로 SNS를

이용한 세계 복음화 작업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랍니다.

[님은 구굽니까?

오랜 시간 후 현실로 오니. 제 눈에 가장 흥미로웠던 것이 폐북이었고

이제 한 달이 되었습니다. 이런 통찰력과 이런 질문도 처음이거니와

약간 흥분된 저의 글의 끝맺음도 정확히 내려 주시네요!

대화 중 느낀 것은 이론엔 정리가 되셨으나 실험엔 부족함이 보입니다.

영성은 이론이 아닙니다. 실체지요 그 차이는 피조와 창조의 차이입니다.

길잡이가 있으면 그 길은 쉽습니다. 저는 그 선생을 찾지 못해 힘든

길을 걸었습니다.]

아멘! 정확한 진단, 감사드립니다.

그 창조의 실체를 찾기 위해 페북과 이론을 통해서 실험정신으로

정진(精進)하고 있는 것이 현 주소 입니다.

그렇다고 없는 실체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이론과

실체가 분리되어 있다면, 결국 수행이라는 행위적 방법으로 방향

수정을 해서 발걸음을 재촉해야겠지요.

그 동안 행위와 믿음 사이에서도 님이 지적하신대로 많은 시행착오

(試行錯誤)를 거치면서, 얻은 나름대로의 결론은 말씀의 깨달음 자체가

행위의 시작과 끝을 모두 포함하는 창조실천(創造實踐)의 에너지를

생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깨달은 만큼 믿음뿐만 아니라, 행위도 포함하는 그릇으로

완성된다는 것이었지요. 말씀이 예수님의 장성한 영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성경 속의 여러 선진들을 만나 봅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 외에는 영성을 완성한 사람은 없었지요.

모두가 그들의 실패한 영성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진실을 통해서

모두가 부분적이라는 것과, 그들의 부족한 인성과 영성을 들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신성을 증명하셨지요.

우리의 부족한 모습 그대로 나타내시고 또한 이루신 것입니다.

피조에서 창조로의 변화는 우리의 이 모습 이대로 못난 그릇 그대로

머무르되 그 토기 그릇 안에 보석인 하나님의 신성을 담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무엇으로 의로워지고, 거룩해 질까요?

전적인 하나님의 도움입니다. 결국 그 도움을 정당하게 받아 드리게

하는 순종과 믿음이겠고 이에 대한 수행의 실천방법이 되겠지요.

어쨌든 바울과 모세를 통해서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그 실천의 바른

노하우를 전수 받기 때문입니다.

그 실천의 열쇠는 나의 수행의 실천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실천, 즉 하나님 앞에 서지는 겁니다!

[저는 머리를 비우느라 2년을 산속에 꼬박 있었죠!

그 4/1은 금식이었을 것입니다. 20년 배움이 하나님을 대면하는데

걸림이 되었죠. 하나님을 진정 만나려면 한번은 내 이론 내 방법이

다 버려져야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나의 순서가 정리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내면의 음성에 순종하려면 그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만족하시면 그대로 가던 길을 가시면

됩니다. 그러나 석가모니처럼 진리를 깨닫고 오늘 죽어도 좋을 만큼

진리에 갈급하시다면 선다싱처럼 하나님을 정말 만나지 못하면 죽겠다고

철로에 자신을 묶을 만큼 갈급하다면 한번은 그 시도가 있어야할 것입니다.

말씀의 본체외의 만남! 그때 말씀은 보여 지고 만져지고 호흡되는 생명

이라는 것을 본인이 언급하는 바울도 모든 믿음의 선진들도 다 하나님을

생명으로 만난 자들입니다.

여기서 님과의 일차적 대화는 마무리 짓겠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 완전을 추구한 자가 종국 그 끝에 가서 완전한

하나님을 완전히 전합니다. 저는 30년 영성생활 속에 경계가 풀려

제 영은 말씀이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늘 호흡하며 거하며 대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며 모든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 곳이 십자가상입니다. 그 침묵의 자리에 서면 실제 합니다.

그때 말씀이 됩니다. 말씀은 내가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실 때 하나님의 음성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좋은 대화, 영적 소통 만족하고, 감사드리고, 축하드리고,

진심으로 축복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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