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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靈性)의 만남(I)!

[(탐구와 명상)

‘탐구’는 마음을 ‘진정한 나’ 안에 붙들어 두는 것이다.

‘명상’은 마음을 ‘진정한 나’ 안에서 ‘관조’하며 그 상태에 머무는 것이다.

‘진정한 나’ 가운데 거한 자가 ‘하나님(존재 의식)’의 ‘더없는 행복(지복)’

속에 머물며 관조(명상)에 들어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나’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상을

관조(명상)한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최면’이 될 수 있다.

상을 만들어 그 상에 몰두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만족’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결코 보고 만지고 듣지 못한 것을 ‘관조’할 수 없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진정한 나’에 대한 탐구다!

속박되어 있는 자신의 내면의 ‘진정한 나’를 탐구하여 ‘참 나’를 발견

하고 깨닫는 것이 ‘진정한 자유인’이다.

이 세상(현상계)이 사라지고 내(자아)가 사라져 생각(마음)이 하나님

안에 머문 ‘무심’ 속에 거한 자! 하나님의 ‘더없는 행복’ 가운데 거한 자!

그 안에 머물며 관조하는 것이 ‘명상’이다. 그 안에 붙들어 묶어두는

것이 ‘탐구’다.]   -영성 님-

글이 과학적입니다.

접근방식이 마치 인도의 요가나 불교의 성찰에 관한 내용과 흡사한

면이 있어서 기독교에서도 이런 식의 방법을 사용할 때 오해를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도 생깁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창의적(創意的)입니다.

그리고 새롭네요. 기독교도 체계적이면서 과학적이고 통찰적(通察的)

으로 되어서 신비적이면서 애매모호하고 어정쩡한 자세를 탈피해야할

필요가 절실하지요.

영성을 굳이 이런 방법으로 접근하는 이유와 특별한 동기가

있으실 것 같은 데 추후에 듣기로 하겠습니다.

[통찰력이 대단하시네요! 제가 하려는 의도는 분명합니다.

21세기는 영성의 시대입니다. 기독교도 영성을 체계화 하지 못하면

위기고타 종교도 영성의 본질을 많이 떠나 있지요

그 해결의 공통이 ‘자아탐구(自我探究)’입니다.

그리고 그 만남의 시도는 하나님 신앙에서 만날 수 있지요!

저는 지금 기독교와 타 종교에 도전장을 내밀며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를 보다 이해하기를 원하시며 ‘예수영성’을 보십시요!

그것이 제 실체입니다.

저는 인도도 요가도 불교도 어떠한 영향을 받은 곳이 없습니다.

영성의 본질은 하나입니다. 단지 일반영성의 언어로 한쪽을 이해시키려

쓰고 있고 한쪽은 기독교영성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혼동을 줄 수 있어 이제는 이상 목사의 영성 카페’를 엽니다.

여기선 두개의 나눠진 영성을 합칩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예수’입니다.]

그러시겠지요.

동감합니다. 같은 길을 걷는 것 같아서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근본 동기와 목적과 방법이 매우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불교의 내면의 성찰을 통한 자신을 찾는 과학적인 접근

방법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지요.

나를 찾되 불교는 자기 내면으로 직접 들어가고,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 벌거벗고 서서 하나님을 거울로 비추어진 내 모습을 보고

나를 찾는 것으로 비교해 보았고, 이로서 내외적으로 서로가 하나

되는 작업을 시도하는 것이 영성을 완성 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고 있답니다.

참고로 네이버 블로그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blog.naver.com/kwack0357

[컴퓨터가 문제가 있어 질문에 답을 올립니다.

하나님을 찾는 방법의 안과 밖의 통합 좋은 시도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불교에도 대승불교는 선의 화두 수행법으로 돈오를 강조합니다.

(신을 대면) 소승불교는 위빠싸나의 알아차림으로 점수를 강조합니다.

(내면으로 뛰어 듬)

기독교도 성령체험을 강조하는 쪽과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쪽으로

갈리지요. 가톨릭의 서방교회는 렉티오 디비나 이뇨시아의 형상법은

선불교와 가깝습니다. 동방교회의 예수기도의 호흡법은 위빠사나와

가깝습니다. 사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수행엔 믿음의 문을 열고 순종의 길을 감이 있고 순종하다보면

믿음의 문이 열립니다. 이 둘은 상합합니다.

제 시도는 이들과는 다릅니다! 저도 모를 땐 뭐가 있나하고 열심히

살펴보았으나 헛된 영의 속임이 너무 많습니다.

제 시도는 기독교적 영성회복입니다! ‘복음적 영성회복’입니다.

성령주의자는 가라앉히고 가라앉은 자는 성령으로 일으키는

가장 쉽고 자유로운 삶속에서의 아름다운 영성회복입니다.]

순종과 믿음의 수행절차, 성령과 말씀 간의 조화, 여러 종교 간의

대비 등등. 많은 고뇌의 길을 걸으신 흔적이 역력히 배어있습니다.

이를 고난의 경험에 의한 지경의 확대라는 의미로 큰 축복으로

여기고 있지요. 진리탐구라는 명제에서 그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에 해당하는 넓이는 당연지사(當然之事)가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진리로 가는 길은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하는

것이고, 이런 면에서 세상 용어로 실패는 있어도 성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까지는 모두가 동의할 것입니다.

결국, 진리의 푯대로 나아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길이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진리의 바른 길은 이거다 저거다가 아닌 확률적 개념에서 다루어

져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님은 이를 ‘영성 센타’라는 이름으로 주장하시고자 하시는 것이고

기독교적 영성회복, 복음적 영성회복이고 그 처음과 마지막은

예수님으로 통로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님의 글을 보면, 물론 아직 소수의 글이었지만, 일반 목회자분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그 흔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과

강조가 보이지 않아서 조금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의아하다기 보다는 사실 참신(斬新)하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진리의 믿음의 문을 여는 고유의 수행 노하우가 기존의

방법과 어떤 차별화가 있는지? 강조 하시고자 하시는 방법이 마지막

정의라고 하시는 결정적인 깨달음의 동기가 무엇인지? 알고 싶네요!

기독교의 영성을 과학화하는 작업은 혼돈(混沌)의 현 시대에 와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기 위한 절대절명(絶代絶命)의 적절한

사명이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 도구로써 자아탐구의 수행 방법을 강조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태껏 기독교는 신을 대면하는 쪽으로 결국 내면에 다다르는 방식을

강조 했지만, 님은 내면의 자아탐구를 더 강조하면서 기독교 복음의

영성을 회복하자는 의미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인은 대부분 신을 대면(對面)하는 부분이 늘 강조되어

왔고, 치우쳐 왔기에 새롭게 내면의 탐구를 강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불교의 내면 성찰의 과학을 접목시킴을

생각하게 한 동기가 됩니다.

[글이 정리가 잘 되어있고 논리도 정연하고 배려하는 마음도 깊어

따뜻한 인상을 줍니다. 말씀은 몇 장 몇 절이 아니라 삶입니다.

그가 말하는 전체가 말씀과 합해져야 하겠지요!

오해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지켰던 건 상대에 대한 예의였습니다!

두 가지를 지키려 했습니다!

1. 예수라는 단어와 2. 말씀의 장절입니다.

이것을 꺼내는 순간 대화는 타종교와 논쟁이 시작됩니다.

진리와 영성만으로 논조하고 싶었습니다.

진리로 선 자의 아량과 그들도 품어야 한다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우리끼리만 모여 있는 모습을 세상으로 넓히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온 결과는 오해와 의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벽은 두꺼웠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의 복음이 끊어져 더 이상 이 자리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예수영성을 보시면 신앙인을 대상으로 하기에 1. 2의 경계가 풀립니다.

교수님의 영성이라면 아직 열지는 않았지만, 그 방법론도 알아차렸으리라

봅니다. 문을 여는 방법이 관건이겠죠?

그 문을 대중화 시키는 방법론을 가진 자!

그가 21세기 영성을 대중화시키는 자 일 테니까요?

그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야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모든 인간의 이론과 방법과 논리가 그칩니다.

그 곳에 서면 진리와 세상만사 일체가 다 보입니다.]

다 이해 하고말고요. 온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현 종교계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언약의 새 복음이 완성되도록 기도하고

성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교수님의 학자의 넓은 아량과 깊은 학식을 존경합니다.

답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나 지켜보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뛰어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그 곳의 한계와 맹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저는 ‘자아탐구’로 제시해 본 것입니다.

하나님도 진리도 구원도 확률 게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입니다.

그동안의 대화 감사했습니다. 무더위에 강건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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