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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의 프래그머티즘(Pragmatism: 도구적 실용주의)을 論한다!

[허위인가, 아니면 지혜로움인가?

8년 전 내가 만났던 어떤 정치학자는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학문적 저술은 실제 내용물보다 겉포장이 중요하다.”]

-안정석 님-

허위도 지혜로움도 아닌 ‘요령’입니다. 단지 요령을 허위로 또는

지혜로 또는 꼼수로 보는 사람들만 남아 있겠지요.

어쨌든 그 말 하신 분은 논문에 대한 확실한 자세를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고,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허위든 아니든

인간 매사가 그렇듯, 그분은 경험으로 얻은 지혜의 경지를 터득하신

분입니다. 훌륭합니다.

그래서 선진 학술 저널에서도 주관적 창의 내용도 중요하게 여기지만,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사항은 객관적인 외형 형식(Format)과 서양적

사고인 논리적인 전개 요소를 갖춘 자료가 됩니다.

한국 분들은 외향적인 형식보다도 내면적인 독창적인 내용에 너무

목숨을 걸다 보니, 논문에 대한 오해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결과적으로

서구 중심으로 전개되는 학술지에서 피해를 입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하겠지요.

[선생님, 독창성은 한국 학자보다 서구 학자들이 더 중시하고, 더 소중히

실천하고 있다고 봅니다만. 한국 학자들은 서구 학자들보다 더 형식에

치우치지 않은가 생각해요.]

그래서 한국 분들이 학술지에 대해서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형식이라 함은 체면이나 겉치레하는 것과는 다른 개념으로 보셔야

합니다.

서구의 형식은 보편적으로 객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언어와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동양의 형식은 양반과 상놈을 구별하고

차별하기 위한 체면적형식이라며, 오히려 서구적 관점에서의 형식은

그 모호한 형식의 틀과 경계를 깨고 합리적 사고에서 이해되어

지는 것입니다.

물론 창의가 서양에서 소홀히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더욱 과학적 사고가 발달된 곳이기에 창의는 생명과 같습니다.

그러나 학술지란 것은 창의란 근본적인 것이지만, 논문에 대해서

결정적인 창의성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전문가를 비롯한 일반 독자들에게 골고루 평가받기 위한 성격이

더욱 강하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학술지에 실릴 정도이면, 소수 전문가에 의해 검토된

내용이지만, 여기서도 실제 창의적인 내용만 집중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논문의 진행 상태를 점검하는 정도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가 됩니다. 물론 논문마다 약간의 차별이 있고

분야마다 다르겠지만, 대개의 경우, 유명 학술지라 하더라도

창의성이 뛰어난 경우는 드문 경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학인 경우도 아인슈타인 같은 거물급들의 논문도 그 당시에는

창의성으로 인정받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경우도 있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창의성 있는 독자적인 논문을 내어

놓기가 거의 가뭄에 콩 나듯 귀한 물건이 된 겁니다.

대개의 논문이 창의성에서는 오십보백보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 현실적인 실정입니다. 그래서 학계에서 황우석교수와 같은

조작극(造作劇)이 난무하고 있는 이유를 굳이 찾을 수가 있지요.

한국 학자들 사이에서 창의성이라고 이야기들은 난무하고 있지만,

실제 서구적 중심사상인 창의성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에서

겪어야하는 열등감에서 유래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예전에는 한국에서 박사학위 취득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는 것보다 더 어려웠지요. 그 이유인즉슨 박사를 배출한

역사도, 배출해야 할 박사교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겪는 고육지책

(苦肉之策)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창의성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체면이나

겉치레적인 것, 즉 인사성, 인간성, 충성심, 정치력 등등을 요구하게

되니, 슈퍼 인간이 되지 않으면 한국 박사 따기가 불가능한 것이었지요.

다 부족한 전통과 억지에서 나온 부작용들이었지요.

물론 논문에 독창성뿐만 아니라 인간성이나 성격 등 모든 요소가

들어가면 좋겠지만, 이것들이 무지에서 나온 억지춘향격 사건이라면,

이건 아닌 것이겠지요. “이것은 아니다“ 하는 기준이 있는 사회가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정의구현(正義具現)된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서구에서는 창의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자연발생적(自然發生的)인

우연(偶然)의 것이 아니라, 논리와 이치를 합리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구의 초등

교육에서는 철저한 자기표현 능력을 훈련시킨답니다.

절대 공짜가 없다는 것을 쓰기, 읽기, 말하고, 발표하는 것들을 통해서

철저하게 평가 되고 경험되는 좋은 전통이 일찍 정착되어 있었습니다.

말로만 백년대계를 외칠 것이 아니라,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의

합리적 실용성에 의거한 교육의 실질적 체계가 한국 초등교육에서부터

완성되어 정착 되어야 합니다.

[프래그머티즘 [pragmatism]

영국의 경험주의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아 관념적이 아닌 실제

생활과의 관련 속에서 사상을 생각하는 입장이며, 미국적인 철학이다.

이들의 주장에는 실생활에 유용한 지식과 실용성이 있는 이론만이

진리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절대적, 선험적 원리, 불변의 자연법칙을 거부하고 상대적인 것,

경험적 원리, 지속적인 변화를 강조한다. 따라서 모든 지식과 진리,

신념은 일시적인 것이며 그러므로 ‘끊임없는 반성과 실험’이 요구된다고

보았다. 또 프래그머티즘은 인간과 그 행동을 중시함은 물론 그것을

중심으로 세의 현상을 이해하고 해석하고자 하는 점에서 인간 중심

주의의 철학이다.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말은 퍼스가 처음 사용했으며

‘지식은 도구다.’라는 말을 남긴 듀이는 이 철학에 경험주의와

도구주의라는 용어를 소개해 ‘도구적 실용주의’를 주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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