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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께 잡힌바 된 사람, 참 신앙인!

[“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행22:8)

사도바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그리스도인이 맞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하나님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테두리 안에서만 하나님을

생각하기에 자신의 신앙관도 그 테두리에 맞춰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사도바울이 자신의 의와 확신 속에 살아 오판을 하고 정죄를 하며

기독교인들을 핍박을 한 것처럼 올바르지 않은 신앙관은 잘못된 정체성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바울의 정체성은 다메섹 선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한 것을 봅니다. 종교인에서 신앙인으로 변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 오래된 습관, 나 중심적인 신앙관, 잘못 이해한

하나님의 속성을 바로 잡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나의 가던 길을 멈추고 나의 생각을 정립해 볼 필요도 있을 듯싶습니다.

하나님께 말씀과 기도로 그 분의 뜻을 발견하고 인생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이 겸손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올바른 정체성을 가진 자들의 바른 신앙관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내안에서 원하시는 대로 일하시고 나는 그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도록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도행전 22:1-11 묵상)]

-Yun Ester 님-

‘올바른 신앙관’이라고 했을 때, 어느 누가 감히 이 범주 안에

들어 있다고 감히 장담을 할 수 있을까요? 누구도 이 주제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교만한

사람이지요.

그러기에 바울은 마지막에 선한 싸움을 하면서 믿음을 지켰다고

감격으로 고백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선 줄로 생각할 때 넘어질까

경계하라”는 말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교만의

죄를 두고 하는 교훈이겠지요.

예수님마저도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기 바로 직전에 마지막 숨을

뱉으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 이었지요. 다 이루었다는 의미는 여러

의미가 있었겠지만, 바울이 생각하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부여

하신 사명인 선한 싸움을 다 마치셨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올바른 신앙인이란 결국 죽을 때 내 쉬는 숨이 나타내는 말로

하나님에게 판단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신앙인이란 자기를 부정(否定)하고 매일 자기의 십자가(十字架)의

도(道)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신앙인의 자세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사실 가는 길을 멈추고 과연 올바른 신앙인의 길을

가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틈조차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분들은 타인의 눈에는 오히려 우직스럽고

고집스러운 신앙관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아마 우리들이 상상하는 멋있는 논리와 이치로 인격이 잘 갖춰진

현실 속의 아름다운 사람은 분명 아닐 겁니다.

[마음에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기를 간절히 바랄 때, 주님이 이뤄주시리라

믿습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거주하시기에 내가 마음에 무엇을 품고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마음의 대한 행동의 반응이 표출될 것 같습니다.

순례자의 길을 마치고 천국에서 주님의 얼굴을 마주 대할 때까지 나의

바른 신앙생활은 연습과 복습과 실습을 통해서 진행형으로 이뤄지리라

믿습니다. 나의 의지와 성령 하나님의 합쳐진 노력의 대가가 올바른

신앙관으로 인도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나타낸 증거 일 것 같기도 합니다.]

바울은 원래 학자로서의 자질을 잘 갖추어진 사람이었지요.

따스한 가슴 보다는 차가운 머리로 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그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해서 차가운 머리와 따스한 가슴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 되었지만, 죽을 때까지 그는 한 번도 서서 뒤를

돌아 본 적이 없었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예수님을 향한 긍휼한

마음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짐작을 해 봅니다.

처음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심판하시는 무서운

분으로 나타나는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가련한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지요.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바울은 그동안 막혀 있었던 그의 교만했던

마음이 한 번에 뻥 뚫리면서 성령님의 흐름을 몸소 체험하고 회심

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치와 논리의 차분하게 따지는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니었지요.

한 순간에 폭풍을 만난 것 같은 뜨거운 눈물의 감정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렇게 차가운 머리로 경험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물밀 듯이 터지는 복 받히는 충격으로 하는 것이랍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는 이론이 아니라,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사랑하는 하해(河海)같은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것이지요.

참 신앙인이란, 예수께 잡힌바 된 사람으로, 뒤에 있는 것은

다 잊어버리고, 오직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푯대를 향하여,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사명을 향하여

달려가는 믿음의 군인들입니다.

“하나님이 마침표를 찍기 전까지는 결코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된다.”
– 밥 모와드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Endure hardship with us like a good soldier of Christ Jesus.

No one serving as a soldier gets involved in civilian affairs-

he wants to please his commanding officer.)

<2 Timothy 2:2-3>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Not that I have already obtained all this, or have already

been made perfect, but I press on to take hold of that for

which Christ Jesus took hold of me. Brothers, I do not consider

myself yet to have taken hold of it. But one thing I do:

Forgetting what is behind and straining toward what is ahead,

I press on toward the goal to win the prize for which God has

called me heavenward in Christ Jesus.) <Philippians 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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