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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주여 부르는 자는 주와 하나 되지 못한 증거!

“부처 네가 그 부처가 됐으면 네가 만난 그 부처는 죽여야해. 네가 됐으면 네가 섬김의 대상으로 갖고 있는 그 부처는 더 이상 그 부처가 아니잖아. 그게 부처를 죽이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이 현상계에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문자적인 그 성경에만 갇혀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니까 거기에 쓰여 있는 그대로 도덕과 윤리 이런 것들로 막 행해 보는 거예요. 되지도 않을 일이지요.

우리가 성경이나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이 세상 성전 이런 것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 되면 더 이상 우리는 그걸 섬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말씀으로 생명으로 섬기신 거구나.” 라고 깨닫게 되고 이렇게 하나님의 섬김을 받은 ‘나’로 새로이 누리며 사는 거예요.

그걸 찬송이라 하고 예배라고 그러는 거예요. “도대체 내가 뭔데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향하여 당신의 생명을 쏟아 부으셨을까? 이 깨달음의 감동이 내 마음으로 들어와서 내가 하나님과 하나 되는 때까지 가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찬송이 나와야 된다니까요.

사라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의 그 믿음의 선진들이 막벨라(양 우리) 굴에 묻혔다. 거기가 성도의 무덤이다. 율법의 상징인 그곳, 율법에 대하여 율법으로 죽어야 다시 살게 된다.”

-이소이님-​

“주여, 주여, 부르는 자는

여전히 주와 하나 되지 못한 증거로다!”

내가 부처이고, 내 안에 성전이 있어 하나님과 하나되어 거하는데, 타신지석으로 두 손 들고 하늘을 향하여 내 입에서 주여 주여라고 부른다면 나와 부처와는 상관 없는 사람이고, 또한, 남의 이름 부르듯 주를 부른다면, 내 안에 주가 없다는 증거이겠지요?

애로스에 대하여 죽었을 때 아가페 사랑으로 거듭나게 된다. 애로스는 아가페 사랑의 마중물이자, 아가페 사랑으로 가기 위한 희생 제물이 되는 것이다.

율법 없는 은혜 없듯이 육적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는 영적 사랑도 없다. 인간 없는 하나님 존재 없듯이, 인간의 존재감 없는 하나님의 의미는 퇴색되기 마련이다.

거룩함이란 죄의 바탕 위에서만이 성립하기에 창세기의 도입부에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을 위해 필히 인간의 죄를 설정하는 모양을 가지게 되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능히 아시면서도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 병주고 약주는 주역을 자처하신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한 사랑의 첫 시도라는 점에 방점을 두어야 하겠다.

어쩌면 죄란, 다른 생물들과 구별되어진,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절대적 신적 권위의 일부를 양도 받았다고 여기는 것이 바른 해석이라 하겠다.

인간이기에 죄인이 되어야 하는 숙명, 신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기 위한 당연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터무니 없고 억울한 것이 아니라 신의 인간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하겠다.

결국, 인간에게 죄의 굴레를 덮어 씌운 것은 죄를 지은 인과응보로 죄인으로 치부하자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창조주 신과 구별하기 위한 방편으로, 상대적 관계성을 확립하기 위한 피조물인 인간에게 주어진 명칭(?)이라 하겠다.

♡도천 곽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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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

율법에서 죽고 다시 살아난 자,

율법을 폐하고 율법을 완성한 자,

율법을 의로 완성한 자

: 그리스도 예수”

-K-스땅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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