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세속화, 종교의 대중화, 무엇이 문제인가?
‘종교의 세속화’라는 주제가 떠오르네요.
세속화된 종교와 세속화 되지 않은 종교, 어느
것이 현실 성공의 기준에서 더 유리할까요.
어쩌면 논의 자체가 허무한게지요.
세속화의 대중화에 대한 바람이라면, 종교의
입장에서는 결코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진정한 종교의 대중화는 현실 세속화가 아닌 종교의 현실과의 구별화에서 실현될 것임은 분명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진정한 불교의 대중화는 소승과 대승의 불교 교리를 막론하고, 불교의 진정한 회귀를 위한 정화운동에서 비롯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종교란, 종교가 지닌 본연의 철학과 영성과 교리(?)를 망각한채, ‘종교의 대중화’라는 명목으로 애쓰는 한 종교의 세속화 내지는 종교의 타락화는 불보듯 뻔한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물론 종교도 우리네 인생의 흥망성쇄의 과정과 유사하게 정반합의 성장통을 거치면서 진화해 나가겠지만 적어도 종교와 세상 생활과는 이원화되어 분리되어야만 건전한 대중화 내지 생활화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확신해 봅니다.
“종교의 대중화와 생활화?”
결국은 하향 평준화되는 종교의 세속화로 결론 내어질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종교 하나만이라도 종교의 거룩한 본질을 고수할 때에 우리 인간 승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으로부터 ‘존경과 사랑(with respect & love)’의 대상으로, ‘조화와 균형(harmony & balance)’을 배울 수 있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고유한 인간 유산으로 남겨져야 합니다.
진리라는 이름으로,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종교가 보호(?)되지 않는 한 종교의 급속한 타락과 함께 저속한 인류 문명의 멸망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천 곽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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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깨달음을 얻어 차별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육신이 몸담고 있는 차별지(差別地)인 이 세상은 여전히 존재한다
따라서 수행자는 세상의 공한 이치만을 깨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공한 세상을 열심히 값지게 사는 방법 또한 깨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즉, 집착 없이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 한다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 색불이공(色不異空) : 色은 空과 다르지 않고,
-공불이색(空不異色) : 空은 色과 다르지 않다.
왜 물질인 色이 空과 다르지 않은가?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이 뜻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야경을 꼭 봐야 합니다.
반야경에는 어떻게 나와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색자성공(色自性空)
반야경(대반야바라밀다경)에는 색자성공(色自性空)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 이 말 앞에 색자성공(色自性空)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물론 반야심경에는 색자성공(色自性空)이라는 말이 안나옵니다.
색자성공(色自性空)의 뜻은 色(물질) 자체의 성품이 즉 본성이 空이다 라는 뜻 입니다.
우선적으로 위의 이 뜻을 이해해야만,
색불이공 공불이색/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뜻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色의 성품/본성/특성이 空이라는 의미입니다.
비유로써 설명하겠습니다.
흙으로 만든 도자기 그릇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도자기입니다.
그러나 도자기의 성품/본질은 무엇입니까?
바로 흙입니다.
다시 말하면 도자기의 성품은 흙이라는 얘기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도자기지만, 본질은 흙이죠.
색자성공(色自性空), 이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몸이지만, 그 몸의 본질/본성은 실체가 없는 空인 것 입니다.왜냐면 몸이란 인연화합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에 거기엔 독립적인 실체가 없어서 空입니다.
색자성공(色自性空)
색 스스로의 성품이 곧 공이다 라는 뜻 입니다.
2. 색불이공(色不離空) 공불이색(空不離色)
-색불이공(色不離空): 색은 공을 여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여의지 않는다는 것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왜냐면 색의 본질이 바로 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색의 성품/본질이 공인데, 색과 공은 따로 떨어질 수가 없는 것 입니다. 도자기의 성품이 흙인데, 도자기와 흙은 따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공불이색(空不離色) 공은 색을 여의지 않는다.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공은 색과 떨어져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공이란 색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공불이색(空不離色)이라는 뜻은 공이 곧 색의 본질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비유하자면 흙으로 도자기가 만들어졌으니 흙과 도자기는 떨어질 수가 없다는 뜻 입니다.
3. 종합해서 결론을 내려 보겠습니다.
색자성공(色自性空),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離空 空不離色),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본래는 반야경에 위처럼 긴 문구로 배열되어져 있습니다. 색의 본질이 공이니 서로 다를 수가 없고, 공은 곧 색의 본질이니 서로 다를 수 없다.
비유 : 도자기는 흙과 다를 수가 없다. 흙이 본질이니까! 흙이 곧 도자기의 본질이다.
색의 본질이 공인 것 입니다. 색의 특징이 공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물질이지만,
그 특성/본성이 공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는 겉이고 또 하나는 안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물질이지만, 그 본성은 텅 빈 공이라는 뜻 입니다.
4.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은 반야심경에 나오는 구절로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는 자성(自性)이 없는 허상의 세계(空)이지만 인연으로 인하여 분명히 존재(色)하는 세계이므로 집착 없이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어록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서 산과 물이 없어지거나 혹은 산과 물이 서로 뒤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니
깨달음을 얻어 차별이 없는 경지(空)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육신이 몸담고 있는 차별지(差別地)인 이 세상은 여전히 존재(色)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세상의 공한 이치만을 깨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공(空)한 세상을 열심히 값지게 사는 방법(色) 또한 깨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 색즉시공(色卽是空)은
이 세상이 실체가 없는 허상이므로 중생들이 세상사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가르침이며
– 공즉시색(空卽是色)은
비록 공한 세상이지만 (집착 없이) 열심히 세상을 살도록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가르침이다.
하지만 역대의 많은 스님들은 색즉시공을 주로 보여주었을 뿐 공즉시색까지 잘 보여주지는 않았다.
즉 출가하여 산속에서 수행하면서 속세에 대한 집착을 놓는 모습은 보여주었지만 세상 속에서 중생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을 구제하는 대승 수행자의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치우침은 불교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많은 祖師들이 색즉시공(色卽是空)만을 강조한 이유는 중생들이 세상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세상의 공함을 강조하여
그 집착을 조금이라도 놓게 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중생들에게 공즉시색(空卽是色)까지 가르칠 경우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가르침은 잊어버리고
공즉시색(空卽是色)만을 마음에 새겨 세상사에 빠져버리는 것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사들의 반쪽 가르침은 결국 소승적 수행으로 치우치는 원인이 되었다.
대승불교의 핵심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을 근본으로 삼아 공즉시색(空卽是色)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이 허상임을 깨치면서 동시에 집착 없이 세상을 위하여 열심히 사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 곧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 바로 대승불교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색즉시공뿐만 아니라 공즉시색까지 가르쳐야 불법을 온전히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현실을 외면하면서 도피하는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종교인 것이다.
세상 속에서 중생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세상을 위하여 열심히 사는 것이 바로 대승불교이지만
공즉시색의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이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데 있어서 수행자들은 큰 혼란을 겪게 된다.
많은 수행자들이 차별심을 내지 말라는 경전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여 공즉시색을 실천하는 데에 갈등하고 있다. 차별지인 이 세상에서 차별심을 버리려고 하니 경전의 가르침이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은 차별지이므로 차별이 분명히 존재한다.
남녀가 구분되어 있고,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그리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구분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차별지에서 차별심을 버린다고 해서 남녀를 구분하지 않거나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과 동일하게 대한다면 그것은 경전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송영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