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하루 동안에 우리가 하는 생각들은 셀 수가 없습니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많으면 머리도 복잡하고
마음도 어수선해집니다. 우리병실 내 옆자리 인생의 선배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지 말고 깊이 하라”는 조언을 해준 것이
기억이 납니다. 생각의 가짓수를 늘리지 말고 생각의 뿌리를 깊이
하라는 뜻이었다, 생각합니다. 어떤 한 가지 생각에 잠기다 보면
우리는 뜻밖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참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구나, 내가 세상에서 받은 것이 참
많았구나! 라구요. 지금 내게 다가온 삶의 축복들을 하나하나 꼽다
보니 수없이 되뇌게 되네여. 고마워요, 사랑합니다.]
-친절한 김성팔 님-]
생각의 ‘십자가 이론’을 한 번 그려 봅니다.
십자가의 가로 세로 길이 비율에 비례해서, 수평생각과 수직생각을
나누어 보면 이해도 쉽고 재미도 있겠지요. 우리의 얼굴의 가로
세로 비율도 있고 사람들의 키와 팔을 벌렸을 때 가로 세로 길이의
비도 십자가의 길이 비와 대충 유사한 길이 비로 비교가 될 수
있겠네요.
여러 가지 잡다하게 넓게 생각하는 것을 가로의 ‘수평 생각’이라고
하고 단일과제를 깊이 생각하는 것을 세로의 ‘수직 생각’이라고 한다면,
대부분 우리네 일상 삶은 깊이 있는 세로의 수직생각보다 가로의
수평생각이 더 지배적이라고 단언할 수 있지요.
그 이유는 현대의 바쁜 생활에서 깊이 생각할 틈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여러 잡다한 생각은 결국 걱정을 낳게 되는데, 통계에
의하면, 우리의 걱정의 대부분은 전혀 일어나지 않을 일과 일어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들로 꽉 채워져 있다고 했지요.
기껏 걱정 중에 4-5% 정도만 걱정해야 하는 것들이랍니다.
결국 평소에 하는 생각 중에 이 정도로 생각의 폭을 줄여야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생각을 한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기계 인간이 아닌 이상, 그렇게 생각의 가지를
다 잘라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적당히 두리뭉실해서 십자가
비율 정도만 자제를 해도 훌륭한 인생 결실을 맺게 되리라 확신해
봅니다.
그리고 옛말에 “깊이 팔려면 먼저 넓게 파라”고 했지요.
넓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역시 깊게 파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요즘 같은 지식의 바다에 사는 사람들은 더구나 다양한
생각의 폭을 요구하는지도 모릅니다.
깊이 파려는 의도를 가지고, 넓은 인생경험을 준비하는 것은
중요하겠지요. 인생도 세월과 같이 유행을 따라 가려면 우선 변화에
민감해야 하겠고 변화를 주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순발력(瞬發力)과 판단력(判斷力)이 요구된답니다.
넓이와 깊이의 적절한 십자가 조화가 순발력과 판단력을 기본으로
하는 훌륭한 통찰력(通察力)을 갖춘 이상적인 인간형이 될 것입니다.
생각을 깊게 하는가? 자질구레하게 넓게 하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서 영혼의 아름다운 열매를 조화롭게 맺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조건이 되리라 하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다음에 공유한 묵상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마음에 깊이 와 닿는 내용이 있어서 공유해 봅니다.
[“아테네 사람과 그 곳에 사는 외국 사람들은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말하거나 듣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행17:21)
지적욕구, 시간, 종교심(알지 못하는 신)에 중점을 두고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준을 어디에다 두고 ,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인생이 허무해질 수 도 있고 보람될 수 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를 기준으로 할 때,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평등하게
주워진 시간입니다. 그 하루하루를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그 개개인의
몫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다”처럼
주기도문이 생활화되는 삶을 살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한
사고에서 볼 때 , 지적욕구는 세상의 무의미한 지식과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고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될 것 같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욕심에 이끌리게 되는
가봅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도 그 한 가지를 순종 못하고 선악과를
택하는 우매함이 누구나가 마음속에 존재 하는가 봅니다.
그 욕심 중에 지적욕구는 생각을 점령하는 것이기에 올바른 지식을
선택해서 마음속에 쌓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마음에 쌓인 것들이
나에게 행동을 요구할 때 이웃에게 향한 사랑의 몸짓들을 할 것 입니다.
성령님이 주신 감동대로 나에게 주워진 시간 속에서 보람되고 복된 일들이 일어날 것 입니다.
종교심은 내가 추구하는 것에 대한 성실한 마음입니다.
알지 못하는 신들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을 가져 하나님의 마음을 격노케
하는 우매자가 아닌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는 인간의 한계로는 미처 상상할
조차 없는 여호와하나님을 경외하는 종교심이 지혜로운 자의 바른 선택입니다.
종교심은 믿음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믿음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로 이뤄진 축복입니다. 그 축복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고 그의 뒤를 쫓아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천국의
가치를 둔 성령 충만한 자들의 삶이지 않을까를 다짐해봅니다.
사도행전 17:16-23 묵상] -Yun Ester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