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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시간에 나눈 세 가지 이야기!

수십 년 동안 그렇게도 무심하게 대했지만, 여전히 때가 되면

활짝 웃어 주는 나의 자식 같은 문주란(文珠蘭)을 소개합니다.

비가 부슬 부슬 나리는 오늘 같은 날, 내 마음을 밝게 비추어

주는 햇빛과 같은 고마운 자식이다.

토요일은 테니스 회원의 날이다.

특히 토요일 아침에는 고등학교의 대선배이신 원로님을 모시고

테니스를 치고 점심을 같이 하는 날이기도 하다.

여러 재미나는 이야기 가운데에 세 가지가 특히 유익한

내용이어서 여기에 함께 나누고자 소개한다.

첫째는 인생은 풀과 꽃 같아서 부와 이름과 명예와 상관없이

피었다 지고 떨어지고 흙으로 돌아간다. 이들은 누구하나 자기

얼굴을 후세에 알리려고 하지 않아도, 봄이 오면 피고 여름이

오면 융성했다가 가을이 오면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그

화려했던 시절을 조용히 마감한다.

이것이 자연과 우주의 순환(循環)되는 생명(生命)의 원리(原理)이다.

살아 있는 존재는 이 섭리(攝理) 안에서 누가 딱히 가르쳐 주지

않아도 예외 없이 순종하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래서 성철 스님이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인간만이 기를 쓰면서 그 섭리의 틀을 벗어나고자

무지 애를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욕망이 자연과 우주의

법칙 위에서 살고자 교만스럽게 부와 이름과 명예를 축적하고자

하지 않는가?

이는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야하는 뭇 만물의 흐름을

거슬리는 결과가 되어서 이렇게 인간 살아가는 세상이 더

각박하고 살벌해지는 것이지요.

자연의 섭리를 벗어나는 인간이 만든 모든 구조물을 성경에서는

바벨탑이라고 하지요.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려는 못된

교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랍니다.

성철 스님이 이 도를 깨닫고 말씀 하신건지는 나도 모른다.

허지만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다”라고 하는 말씀이 오늘의

깨달음에 동성(同乘)해서 가장 찐하게 뇌리(腦裏)를 스치는 것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가 하나가 되어, 협력해서 선(善)을

이루기 때문이다.

산은 산이요, 사람은 사람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천재지변에 대해서 보장해 주는 보험회사

직원이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큰 천재가 갑작스럽게 발생해서

큰 손해를 보았다고 한다.

사장이 책임 맡은 직원을 불러 꾸중을 하자, 직원이 머리를

긁적이며, 누가 그런 일이 일어나리란 예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사장이 크게

그 직원을 나무랬다고 하는데, 그 이유인즉슨 적어도 남은 다

모르는 것도 그 직원은 천재지변에 대해서 알아야 된다고 했지요.

왜냐하면, 그 직원은 천재지변을 예상하는 것으로 봉급을 받기

때문이랍니다. 여러 분은 이해가 가시는지요. 그 직원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지요. 하나님께 무지 기도하고. 물어 보아야

하는 거지요. 하나님을 믿어야하는 이유가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한창 철의 장막으로 세계가 극명하게 사상적으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갈라져 있을 때, 서독일의 에르하르트

수상이 새해 첫 성명에 관한 내용이다.

Hatred against Freedom!

자유를 향한 증오의 감정!

곧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증오심(憎惡心)을 가져야 된다는

성명서다. 자유는 자유를 방해하는 악의 세력과 일대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절대 거저 얻어지는 자유는 없다는 이론이다.

이에 대해서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연결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이나 불교의 자비에 대한 가르침으로는

절대로 자유를 쟁취할 수 없고 이는 오히려 자유를 방치(放置)해서

인류를 더욱 황폐(荒廢)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이야기이지요.

어느 인간치고 악하지 않는 인간이 없다고 하면서도, 사랑하고

자비하라고 하면 어떻게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자유하게 되겠느냐?

하는 일리 있는 물음이 아니겠는가.

반면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서 사탄 마귀와 같은 어둠의 악의

세력을 대항해서 절멸 시키라는 추상같은 명령을 복종하고 따르라고

하니,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 건지? 우리 같은 평범한 범인은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거지요.

용서(容恕)와 단죄(斷罪)는 결국 인간의 육과 영의 본질에 대한

분별을 하지 않고는 이해되지 않을 것 같다. “죄는 미워하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에서 죄를 짓게 하는 본질인 악은

단죄해야 하지만, 속아서 죄는 지었지만, 언젠가는 회개하고

돌아 올 하나님의 신성(神性)을 가진 인간의 속성은 당연히 용서

받아야할 것을 분별하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자유를 향한 증오’의 의미는 용서와 단죄를 정확하게 분별하여

비록 용서는 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를 가로막고 있는 악(惡)의

세력에 대해서는 세계의 자유민들이 하나가 되어 단호하고 결연한

자세로써 대항하여 싸워 이겨야 한다는 요지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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