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나’를 찾아 가는 길, ‘나’를 부인(否認)하는 것!
유식무경(唯識無境): 오직 인식 작용만 있고, 인식 작용이 분별하여
상정한 대상은 허구라는 뜻. 분별로써 지어낸 대상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식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
‘아는 것(認識)’과 ‘있는 것(存在)’인 식(識)과 경(境)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주관(主觀)과 그의 대상이 되는 객관(客觀)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인식과 존재가 근원적으로 일체가 되어 있다는
식즉경(識卽境)의 깨달음과 같다. 일심(一心)이란 곧 정신과 물질,
자아와 우주를 하나로 통합하는 위대한 한 마음을 일컫는다.
잠시 불교교리를 살펴보았는데, 자아에 대해 놀라운 연구가
확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정말 놀랐다.
기독교는 신(神)을 통해서 우리의 자아(自我)를 찾아가고,
또 신의 성품(性品)으로 변화 되어 가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불교는 인간 내면(內面)의 심연(深淵) 속 잠재의식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순수 인간의 모습을 깨닫게 해서 인간의 실용적 처신에
대한 이론이 잘 확립되어 있었다.
인간의 내면과 신을 중심으로 향한 두 개의 다른 방향에서 바라
보고는 있지만, 진리의 길 위에서 움직이는 모습은 유사하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불교는 자아의 깨달음 위에서 스스로 누림을
가지는 것(열반적정(涅槃寂靜))이고, 기독교는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것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된다.
불교는 결국 자아를 부인하지만, 그 결과에서 나오는 깨달음에서
안식(安息)하는 것이고, 기독교는 자기를 부인하는 깨달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신의 능력에 합일(合一)되어서 전능자(全能者)의
능력과 영광을 함께 누리는 것이다.
또 불교는 윤회론(輪回說)을 통해서 그 깨달음의 흐름이 이승과
저승을 반복하면서 열반(涅槃)을 이룰 때까지 계속되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고, 기독교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영생(永生)을 선물로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자기 부인(否認)으로 시작은 같지만, 결말은 다른 것으로 끝을 맺는
답니다. 일체개고(一體凱苦)라 해서 자아에 대한 집착(執着)을 버리게
하는 것의 근간(根幹)에는 ‘나’라는 실체(實體)를 부인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부인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불교에서는 연기론(緣起論)이나
공(空)의 개념을 통해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나, 제법무아
(諸法無我)로 해석하고, 기독교에서는 사탄의 미혹하는 영에
속아서 정욕에 빠져 놀아나고 있는 옛사람을 나타내고 있고,
‘참 나’의 실체는 물과 성령(聖靈)으로 거듭난 새사람,
곧 예수님의 장성(長成)한 인성(人性)을 닮는 것이겠지요.
불교에서 ‘나’라는 실체는 ‘나’라는 존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연기론’이다. 이를 인연(因緣)이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인연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겠지요.
인연이 나를 만든다는 굉장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기독교에서는 사랑의 원리로 인연과 동일하게 설명할 수
있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도 사랑의 고리인
인연의 관계를 맺기 위함이었지요.
4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발을 씻겨주는 세족식을
하셨을 때, 베드로가 극구 말리자, 예수님은 말씀 하셨지요.
네가 발 씻는 것을 마다하면, “나와 상관이 없어진다”고 하셨지요.
그 때 베드로는 놀라면서 “그러면 몸까지 씻겨 달라”고 하는 웃지
못 할 코미디 장면도 있었지요.
사랑은 관계하는 것입니다. 인연을 맺는 것이지요.
불교의 연기론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는 위대한 철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