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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은사(方言恩賜)와 말씀의 비중!

방언은사에 대한 바램의 자세는 성도들의 본질과 그들이 처한

상황과 믿음의 성숙도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말하고 싶군요.

그러나 장성한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방언에 대한 기대나

바램이 스스로 해결된다는 사실도 언급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드립니다.

방언도 중요하겠지만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말씀’이라는

가르침에 더욱 공감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붙잡아야 하는 것은 결국 ‘오직 말씀’으로 귀결이 되어야 하겠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을 가지고 내 안에서 역사를 할 때,

내 안에 있는 모든 죄를 씻고 자르고 태우는 물과 성령의 검과

불로 회개하게 하고 또 동시에 거룩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 신(神)의 성품(性品)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 중에 방언은 하나님의 무한한 체험 중에 정말로 하찮은 피라미와

같은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 답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심과

하나가 되는 감격을 바라고 꿈꾸시고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삶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겠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은사는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함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 너무 미약하게 답글을 달아 주셔서 마음이

놓이진 않네요. ㅎㅎㅎ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사와 체험은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너무 극대화 시켜서 해석을 하거나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으면 문제는 되겠지만요. ㅎㅎㅎ 방언은 신비한 하늘의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Yun Ester 님 인용-

방언을 신비한 것이라고 사모라는 것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實像)’을 경험하지 못했을 때 하는 장식어(裝飾語)에 지나지

않겠지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 이라기보다는 저는 사람의 힘이나 지혜로 이룰

수 없다는 생각에서 신비하다고 설명을 했는데, 하나님의 은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라 서요. 이 글을 쓰신 분도 그렇게 표현 하셨고요.]

물론 신비한 것이라고 무시하라는 말은 아니지요. 바울사도 방언과

예언을 사모하라고 하셨지요. 그러나 상인이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는

모든 것을 팔아서 산다고 했지요. 가장 값진 말씀을 발견했는데도

진주가 아닌 다른 신비한 것에 몰두하느라, 진주의 가치를 평가절하

(平價切下) 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닌 것이랍니다.

하나님은 신비(神秘)를 목적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신비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죽 대신 주는 이유식(離乳食)이나 같은

것이지요. 어른이 먹는 딱딱한 음식이 비록 섭취하기는 어렵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장성한 어른이 먹는 하나님의 딱딱한 말씀을 공급하시길

원하신답니다.

사실 이 말을 드리는 속마음은 교회 내에서 삯군 목회자들이나 기타

은사로 인한 성도들의 폐해가 날로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아래 글의 저자 분은 정말로 탁원한 말씀 능력을 은사로 소지하신

분입니다. 그 능력으로 방언에 대해서 조목조목 분석해 놓으셨지만,

결국은 “방언(方言)은 방언이다”하는 단순한 결론에 지나지 않은

수준에 그치게 되었답니다.

오순절 사건을 보더라도 방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언의 수단을

들어서 쓰신 성령님의 나타나심이 주요한 것이지요. 방언은 방언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성령님은 예수님의 약속을 지키신 것이요, 죽으신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우리와 관계하실

것을 보여주는 계시(啓示)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말씀중심적인 신앙생활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신 것 같네요.

맞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죠. 위의 글의 주제는

“지금도 방언은 존재하는가?” 입니다.

내용이 아주 적절하고 공평하게 설명이 잘 되어진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람의 생각과 경험에 따라서 다른 의견을 내세울 수는 있겠지만요.

은사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치 않다고 느끼시는 것 같은데요. 각자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생각을 하고 훗날 주님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시리라 믿습니다. 깨달은 것만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내 믿음의

분량인 것 같네요. 나중에 주님이 정하신 때에 지경을 더욱더 넓히시리라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

이겠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우선이구요.]

 방언 은사, 좋은 것입니다. 신비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직접적인

손길을 느낄 수도 있고,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더욱 열심으로 기도도 할 수 있고, 성도 간에 교제를

가질 수도 있겠지요.

방언 은사는 대개 두 가지 경우에 유익하게 사용되는데,

첫째는 말씀을 직접 읽을 수 없거나 말씀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없는 경우, 은사가 아니고서는 믿을 수 없는 분들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가 될 수 있겠지요.

둘째는 신비한 은사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개인에 대한 사랑을

확인함으로서 더 열심으로 성도의 기도생활이나 교회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경우, 특별히 어려운 상황과

환경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기적과 같은 신비한 체험으로

단시간에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주로

방언과 같은 유의 은사를 구하는 경우가 많지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은 더디 이루어지고 은사는 빨리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급한 마음 때문이겠지요. 하나님의 뜻

보다는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더욱 간절하고 현실이 급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점차로 믿음이 성장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깊이

이해하고 그분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드린다면 오직 말씀만이 우리를 반석위에 하나님 성전을

세울 수 있게 되지요.

은사란 결국 말씀으로 인도하는 징검다리와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왜냐하면, 요한복음 1장에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은사 중에 은사는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으로 만나는

은사가 되겠지요.

[*** 지금도 방언은 존재하는가? ***     by 박영돈 교수님

성경적인 방언관을 정립하는 데 가장 큰 거침돌로 작용하는 것이 신학적인

전통과 방언에 대한 체험이다. 한편에서는 ‘은사중지론’이라는 잣대로

성경을 재단해 버리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경험의 틀에 꿰맞추기 위해

성경을 조작해 버린다. 어떤 전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성경 해석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신의 해석을 은밀히 주관하는 전제가 무엇

인지를 냉철하게 직시해야 하며 그것을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점검해보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자라온 신앙적인 배경과 전통 그리고 배워온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 방언에 대해 서로 다른 선입견을 갖게 된다. 오순절 교회의

배경을 가진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방언에 대해 긍정적인 반면, 보수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이들은 은사중지론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아주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랐고 오랫동안 보수 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필자의 박사 학위 논문을 지도한 교수는 바로 워필드를

뒤이어 은사중지론을 철통같이 고수했던 개핀 교수였다.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은사중지론이 필자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신빙성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말씀의 능력이

신학적인 전통을 세뇌하는 마력에서부터 필자를 자유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신학적인 전통이나 경험이라는 전제에 의해 휘둘리기를 거부하고

성경 자체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들으려는 진지한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김동수 교수는 방언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은사인 방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영적인 일은

자신이 꼭 체험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영적인 세계, 즉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있다. 만약 자신이 체험한

것만 바로 해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성경 말씀을 거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방언에 대한 말씀을 바로 해석하는 데 꼭 그에 대한 체험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방언을 체험하는 것이 그 실체를 파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관에 치우치게

하여 냉철한 판단을 흐리게 할 수도 있다.

반면에 방언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오히려 성경 말씀을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균형 감각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방언 체험이 없는

이들은 대부분 방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에 사로잡히게 된다. 많은 경우 ‘경험’뿐 아니라 ‘무경험’도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방언

체험의 유무가 방언에 대한 평가와 일치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이제는 이 불행한 연결고리를 끊을 때가 되었다. 그래야만 양극화를

극복하고 방언에 대한 원만한 일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을 하는

이나 못하는 이나 자신들의 ‘경험’ 또는 ‘무경험’이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경의 어디에도 방언이 사라졌다는 확실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 방언은 계시의 방편으로서 성경적인 계시가 종결됨과

더불어 사라졌다는 주장은 성경적인 지지 기반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방언은 사람이 하나님께 신비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지, 예언처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특성상 방언은 계시의 통로가 될 수 없다. 방언이 통역된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한 기도의 내용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

말씀이 될 수는 없다. 또한 방언이 그쳤다는 말씀을 성경에서 전혀 발견

수 없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방언과 예언도 그친다는 바울의 말

(고전 13:8-12 참조)을 성경이 완성되면 방언도 그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바울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신학적인 의미를 주입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이 말한 “온전한 것이 올 때”는 그 말씀의 문맥과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러므로 방언이 존재하느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

다만 오늘날 나타나는 방언이라는 현상이 초대교회의 방언과 질적으로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먼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방언은 오늘날 교인들이 하는 방언과는 사뭇 다른 특성을 띠었다.

사도행전 2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오순절에 제자들이 했던 방언은 ‘외국어’

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난 지방의 언어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이를 보건대 오순절에 제자들이 체험한 방언은 배우지 않은

언어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말하는 현상이었다.

이런 유의 방언을 지금도 하는 경우가 있다는 보도를 종종 접한다. 대천덕

신부의 글에 의하면 한 청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몇 개 국어로 유창하게

외국인과 대화를 했다고 한다. 어떤 목사의 부인은 집회에서 자신이 전혀

배우지 않은 헬라어로 말할 수 있게 되어 거기에 참석했던 그리스 여성

두 명을 주님께로 인도했다고 증언하였다. 또 선교사들이 선교 현장에서

습득하지 않은 토착어가 갑자기 입에서 터져 나와 설교했다는 말을 간혹

듣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 전도하거나 설교하는 것이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제자들의 방언과 꼭 같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제자들의

방언이 찬양과 함께 선포의 성격도 띠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사람들을 향한 설교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습득하지 않은 언어를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기사는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관적인 역사와 비상한 섭리를 우리의 신학적인 편견으로 제한하기보다는

그 가능성을 항상 열어 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런 외국어 방언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처럼 모든 신자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다. 그 방언은

성령이 이 땅에 강림하시는 특별한 이벤트를 장식하는 표적의 성격을 띠었을 뿐 아니라 구원의 복된 소식이 만방에 전파될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섭리적 표증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하여 선교 사역을 출범했다는 것을 알리는

특별한 표증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오순절 후에도 그런 방언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반복되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방언은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방언의

유형에 가깝다. 고린도전서 12-14장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이 방언의

특성은 특정한 지방의 언어나 외국어가 아니라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종의 신비한 언어라는 점이다. 통역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방언을 하는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고전 14:14)라고 하였다. 여기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심령이 아니라 ‘생각’ 또는 ‘이성’을 뜻한다. 즉, 이해하는 마음의 기능을 의미한다. 그래서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하는 내용을 자신의 마음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성경적인 증거를 통해 볼 때 이 방언은 우리의 이해와 인식을 초월하여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비한 기도의 언어 또는 영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외에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

그때의 방언이 어떤 말의 형태로 나타났는지, 어떤 음률과 강세를 띠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 소리가 단음절로 끊어졌는지 연음으로 유연하게 이어졌는지 아무도 들어본 사람이 없다. 녹음된 것도 없다. 그렇기에

지금 사람들이 하는 방언이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과 동일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물론 방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언어이기에 그 진실성 여부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무조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온다고 해서 그것을 다 방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요즘 소위 방언이라고 말하는 현상 중에는 의심쩍은 것들이 적잖다.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이 더러 있다. 그러므로 각별한 주의와 냉철한 분별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이 극단적으로 주장하듯 지금 사람들이 하는 방언을 다 마귀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마귀는 성령의 역사를 모방하는 명수이기에 얼마든지 은사의 모조품을 생산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가 아는 어떤 장로의 부인은 한 기도원에서 방언을 받은 후 귀신들림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 한동안 고생하다가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하자

방언도 같이 사라졌다.

또한 몰몬교 같은 이단이나 타종교에도 방언과 유사한 종교 체험이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는 방언을 무조건

마귀적이고 인위적인 현상이라고 보아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들을 모두

성령의 역사로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방언이 과연 성령의 은사인지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영적 지도자와의 상담을 통하여 면밀히 점검해 보는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  -Yun Ester 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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