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보이게도 하는 중용(中庸)의 ‘경제 민주화’정책!
아담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이 200년을 살아서 지금
우리에게도 강력한 영향력을 주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아담 스미스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정확한 개념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처지를 개선시키고 싶어 한다”
스미스의 이 전제는 ‘self – interest’라는 응축된 개념으로 작용한다.
이 말은 ‘이기심’이라고 잘못 번역되어져 왔다.
스미스가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라고 본 것은 바로 사람들이 자신의 현실을
개선하고 싶어 하는 욕구, 즉 ‘행복추구의 욕구’를 말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자신의 현실을 어떻게 개선시킬 건가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렇게 자유가 주어진다면, 인간은 ‘교환’을 하게 된다.
자기에게 남는 것을 부족한 것과 바꾸려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이러한 ‘교환의지’를 인간의 본능으로 파악했다.
루소가 교환을 ‘이익의 동기’로 본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로부터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큰 뿌리가 형성된다.
사회주의 역시 인간의 행복추구를 인정한다. 그 방법은 루소적이다.
인간의 사회적 불평등은 바로 이 ‘교환의 불평등’이고, 이는 이익동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환에서 이익의 동기를 없애면, 평등은 실현된다.
이에 반해 아담 스미스가 파악한 인간 본능으로서 ‘교환’의 자유는 자본주의의 근본 생각이 됐다. 아울러 교환은 분업을 통해 더 효과적으로 일어나게 된다는 점도 아담 스미스로부터 알게 됐다. 이러한 각자의 자유로운 교환이 전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사회적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거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인간의 교환행위를 본능이 아닌 동기로 보고 이를
통제할 수 있다는 ‘치명적 자만’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전히 아담 스미스의 주장인 ‘교환본능설’은 타당한 것일까.
2008년 이후 이 문제에 전 지구적 차원의 새로운 도전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인간의 본능으로서의 ‘교환’을 다시 루소가 말한 바, ‘동기’로
보겠다는 것이 바로 ‘경제 민주화’의 근본 논리다.
아담 스미스가 옳다면 이 반동들은 다시 실패할 것이 분명하다.]
-한정석 님-
사회주의 경제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서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매우 유익한 설명이었습니다.
동기(動機)와 본능(本能)의 적절한 융합점(融合點)을 찾는 것이
앞으로의 경제 민주화의 핵심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동기를 무시하고 본성과 본능을 따라야 성공한다“는
이론에도 더 많은 무리수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익의 동기를 없애면 평등(平等)이 이루어진다“는 극단적인 전제를
표방한 사회주의자 계획경제가 실패했다는 단순한 핑계로 해서, 교환
본능에 의해서 개인의 행복추구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또 다른
월스트리트(Wall Street) 가의 극단적 자본주의의 병폐가 드러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계획 경제’와 ‘시장 경제’를 단지 대립의 자세로 볼 것이 아니라,
철저한 상호보완과 상호의존의 관계로 전환해서 최근에 유행되고 있는
‘융합’과 ‘통섭’의 마인드를 적극적으로 적용한다면, ‘창의적 경제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짐작됩니다.
미래의 창의적 경제시너지 효과를 최대로 얻고자 하는 바라는 마음이
바로 경제 민주화의 근본 취지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대개의 국가에서는 계획 경제와 시장 경제의 융합형(融合形)
경제정책을 오랜 기간 동안 실질적으로 펼쳐 온 것이 사실이고 이를
몰라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의도도 알고 있지만, 경제정책이
실천 되어지는 과정에서, 극단적인 상황에서 결정이 행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 사상을 선택해야 한다는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겠지요.
‘중용의 경제정책’, 최상의 적정치(適正値)를 제시할 수 있는
‘미래의 폭넓은 경제정책’,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적(敵)과의
동침(同寢)이 바로 ‘경제 민주화’의 근간이 되어야하겠다는 소신을
조심스럽게 피력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