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소통이야기, 세 개!
[(1) 불교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쉽게 불교교리를 말하는 책’이
없다는 거다. 나는 스님들의 에세이나, 명상 집과 같은 책들을 별로 안
좋아 한다.물론 이런 것도 효용성이 있지만, 근본이 약한 지엽의 발달은
결국 쉽게 시드는 꽃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 어렵게 말하는 책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표지부터 보기 싫은 고답적인 어려움이 책의 강렬한 아우라를 형성하는
책들…그러나 읽히지 않는 책은 그저 쓰레기일 뿐이다.
쉽게 말하는 것은, 어렵게 말하는 것 보다 10배 이상 힘들고
100배 이상 숙고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불교에는 교리를 잘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된다. 뜻을 모르면서 어렵게 말하는 것은
앵무새도 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불교는 거대한 새장일 뿐이다.
이 돌파구를 에세이나 명상집이 뚫고 있다.
스님이 썼음에도 서점의 불교 책 분류범주에 조차 들지 못하는 책,
이러한 적도와 북극을 오가는 현실이 바로 오늘날의 한국불교인
것이다.] –자현 스님–
진리의 길은 좁고 협착(狹窄)한 길이라고 했지요.
아무도 거들떠보기 싫어하는 길이니 지지자가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말이 곧 진리의 길 위에 서 계시다는
또 하나의 다른 해학적(諧謔的) 표현입니다.
넓은 길은 사람들이 많이 찾으나, 좁은 길은 찾는 사람들이
없다고 한탄하시는 분이 또 한 분계시지요.
우리 모두가 진리라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식들이
되면 얼마나 부모 되신 진리께서 기뻐하실까? 하는 못난 아들이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스님, 기독교는 하나님만 찾으면 되는데 불교는 석가세존을 비롯해서
여려 보살님, 존자 님등 너무 많아요. 모든 불자들이 간편하게 암송하며
경을 읽을 수는 없는지요? 스님께 자문을 구하며 각기 다르니 일반
불자는 헷갈립니다!] –한동철님–
복잡할수록 진리로 가장하고 숨기는 기술이 쉽게 유지되는
장점이 있답니다.
모 오래된 정통교(正統敎)에서도 성모 마리아를 비롯해서 성인반열
(聖人班列)에 든 사람들의 수많은 이름과 각 종 행사에 동원되는
천사들의 이름을 읊조리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주인 되신 하나님도
업무로 번잡하시니, 언제 직접 성도들과 대면하시면서 진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시겠나하는 노파심이 들지요!
그러니까 ‘신이 없다‘, ‘신이 죽었다‘는 항변 아닌 주장이 나오는
것이겠지요. 사실은 신은 살아 계시니, ‘신이 죽은 것‘이 아니라,
‘신을 죽인 거‘지요.
[그런데 신을 왜 믿으시나요? 진짜 존재한다면 굳이 믿을
필요가 있을까요? 또 자신의 존재도 드러내지 못하는 신이 뭔 필요가
있을까요? 신을 가정하는 것 자체가 현존재로서의 충실함을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요? 삶의 목적은 죽음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어떻게
할 것 인가가 아닐까요? 참고로 비난하려고 말씀 드리는 건 아니니 이
점은 오해 마십시오.
또 신이 인간에게 해주는 건 없지 않나요? 받는 거 밖에 없던데요.
준다는 건 사후문젠데 이건 뭔가 불공평하지요.
또 신이 이 세계와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더라고, 그건 신의 자기만족을
위해서 이었겠죠. 그리고 만들었으니 너는 숭배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건
좀 유치하지 않나요? 부모자식 간에도 이렇진 않잖아요.
또 진짜 부모라면 안 믿고 말 안 들어도 그렇게 딸려 가는 거죠.
말 안 듣는다고 보복하는 건 진짜 얘들 같은 발상 아닌가요?
신의 사랑이 있어도 고통 받는 사람은 고통 받고 착취하는 사람들은
착취하고, 신의 사랑이 없어도 마찬가지고요. 그럼 신의 사랑이 굳이
필요한가요?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실제로는 없는 허상의 옷을
거추장스레 입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지현 스님-
파스칼(Braise Pascal) 이라는 불란서의 수학자이면서 사상가의
말이 생각납니다. 만약 신이 있다고 믿고 신의 뜻대로 열심히
실천하면서 산 사람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만약 죽어서 그 영혼이 하늘나라로 갔을 때, 정말 하나님이 계셔서
심판을 받고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어서 영생의 구원을 받았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문제는 하늘에 가 보았더니, 하나님이 없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하나님 말씀대로 세상에서 하나님이 가르치신 사랑으로
산 사람이 속았다고 억울해서 가슴을 치고 통곡했을까요?
천만에요. 결국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만약 없더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 덕분에 죽고 난 후, 하나님의
반열에 오른 성인이 되어 세상에서 추앙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신이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이 그 사람은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이지요. 이 사람에게 누구도 신에게 속았다고 억울해 할 사람은
한 분도 안계시지요.
어느 모로 보나 인간의 아름다운 지혜입니다.
그러나 만약 똑똑한 사람이 그 똑똑함으로 신이 없다고 자고(自高)
하면서 산다고 합시다.
그런데 만에 하나님이 실존하신다면, 세상에서도 자식이 그 아비를
모르고 살아도 호로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데, 하물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임의로 부정할 경우에는 공의로우신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어찌 부모도 모르는 자식을 그냥 놔두시겠습니까?
심판 받겠지요.
그렇다고 이 사람이 주장하신 대로 신이 없다고 합시다.
과연 이 사람이 신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똑똑하게 세상살이를
했다손 칩시다. 과연 이 사람이 무엇이 되어 있을까요?
훌륭하신 스님이 되어 있을 경우는 매우 잘 된 경우가 되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지요. 백 번 강조하지만, 그는 허무한
이 세상의 먼지 입자만도 못 한 현실 속에서 아무 기약 없이 사라
지겠지요.
누가 인생 장사를 잘 한 것일까요?
신이 있다고 믿고 인생을 거룩하게 산 사람일까요?
아니면 신이 없다고 욕정에 몸을 맡기고 방황하거나, 인생공무
(人生空無)라고 하시면서 스님이 되시는 사람일까요?
파스칼은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지요.
인생은 장사를 잘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변 입니다.
존재를 드러내지 못 하는 신을 혐오하기는커녕, 도리어 감사하고
있답니다. 본인이 실수할 때마다 일일이 나타나서 간섭하시는
전능자와 함께 산다고 했을 때, 어느 누가 감히 감당하면서 살
수 있겠다는 사람이 있을까요?
나는 없다고 하는 것에 새끼손가락을 걸겠습니다.
오염 될 대로 오염된 인간조차도 존재를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는데,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를 나타내겠다는
것은 정말 감당할 수가 없겠지요.
스님이 되고 싶다는 많은 사람들 중에 물론 중생(衆生)을 위로하기
위해 실행하신 분도 계시겠지만, 사실 스님이 되는 많은 동기가
세상의 꼴이 보기 싫어서, 배반 밖에 없는 황폐한 인간이 싫어서라는
이유도 있었으리라는 짐작이 갑니다.
신은 사랑이라고 하지요.
그 사랑 때문에 인간이 존재하고 우리들이 숨 쉬고 사는 것도
그분의 사랑으로 되어 진다고 합니다.
[저는 그냥 단순하고 간결하게, 불교는 수행하는 것이기에 좋습니다.
유일신이나 절대 신에게 죄를 용서해 달라고 <요구>하면 천국에 간다는
것, 즉 면죄부 제일주의와 다르기 때문이죠. 그런 면죄부가 악의 유혹에
더 쉽게 빠지게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불교가 좋아요. 나를 스스로
끊임없이 올바른 길로 가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김종영 님–
저는 한국 불교에 많이 물든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항상 한국
불교 정서에 마음을 편히 가지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지요.
어쨌든 진리는 진리니까, 진리를 사소한 정으로 풀어 가는 것은 정도가
아닌 것으로 사료되어서 좀 더 설명을 드리리다.
스님께서 주시는 질문을 보면,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매우 점수를
후하게 주시는 감을 받았습니다. 다르게 말해서 인간의 모습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신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점에서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어서
신이 없는 인간성은 스스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한심한 존재라는
것으로 인정하고 신으로의 존재로 숨통을 뚫은 것입니다.
자신을 부정한다거나, 인간성을 악하고 게으른 것으로 보는 것이나
혹은 현실 도피의 부작용으로도 신을 의지한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실제 2000년 동안 기독교 문화가 끊임없이 이어 오면서 확대 발전
하면서 일류에 끼치는 선한 영향력을 보았을 때, 그리 잘못된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세상은 모든 것이 법이요 진리입니다. 인간은 더불어 사는 사회입니다.
사회의 공동 삶을 누리는 룰이 필요하고 그 공동 가치관 명분 종교의
기여도 부인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 종교도 시대에
따라서는 가치 명분 설득이 다르게 종교의 교리를 펴야 하는데, 전혀
변하지 못한 종교는 그 명분도 상실하게 됩니다. 명분이 있다면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창조신앙, 우주를 하느님이 만드시고 그 아들 예수님을
통해 죄지은 자를 .. 전지전능하시니, 예수 믿는 자는 천당 가고
불신자는 지옥…이런 교리가 과연 이성적인 판단과 과학적 이론이
성립한다고 주장 하는지.. 불교는 진리를 찾는 구도의 길이며 그
누구에게도 강요나 설득하지 않습니다. 눈먼 도구로 그 누구를 가르치려
드는지? 한국의 기독교는 새롭게 신뢰성 있는 교리를 펴야
할 것입니다] -Dong Bal Yang 님–
[(2) 논리 없는 주장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어떤 주장이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논리와 이를 통한 설득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기독교인일 수 없다.
기독교는 단지 주장과 믿음의 구조만이 존재한다. 물론 이것이 보다
내밀한 본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증명될 수 없으며, 지난 2천년
동안의 기독교역사는 강요와 이익집단의 패권만을 보여줬을 뿐이다.
앞으로 수천 년의 시간을 더 준다고 해도 이 구조가 크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즉 증명불가의 상황에서 존재하는 힘의 논리가 유전할 것이라는
말이다.
또 분명한 건 나는 그것이 증명될 때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는 거다.
해서 나는 나의 이성적 판단과 논리를 선택한다. 이것은 최소한
우롱당할 위험성은 적다. 그리고 나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설령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도 내가 곧 바로 수긍할 수 있다.
나는 내가 한만큼만 바란다. 그리고 나의 선택에 의해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내 몫이다. 내가 선택한 결과라면, 좋지 않은
것이라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 이것이 내가 기독교인들의 지옥협박에도
굴할 수 없는 이유이다. 나는 신보다도 나의 이성과 나의 선택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나 아닌 다른 존재에게 맡기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신이 존재한다면, 너는 너의 일을 해라.
나는 언제나 나의 자존을 모색해 보리라.] –자현 스님–
[(3) 쉬운 불교? 어려운 불교?
불교교리는, 초월적인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합리성에 대한 이성적
추구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쉽고도 어렵다. 쉬운 이유는, 합리의 루트만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려운 건, 원래 합리적이라는 게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스마트폰의 발전은 합리적인 기술진화이지만, 그 기술을
이해한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어려운 것과 같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는
정답이 없는 초월적인 신앙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노력하면 그 누구라도
반드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현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