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공(空)이야기, 인도의 영(0)이야기!
[‘공(空)≠무(無)’ 공(空)은, 없다는 무(無)가 아니랍니다.
우리는 꿈을 허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꿈을 꾸는 상황에서는,
이것은 곧 현실이 된다. 악몽이나 가위눌림은 꿈이 단순한 허상이
아니라는 것을 잘 나타내준다. 즉 꿈은 실체가 아니지만,
꿈이라는 현상은 엄연히 존재한다는 말이다.
꿈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 이것을 불교에서는 공이라고 말한다.
즉 공은 본질은 없지만, 현상은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을 ‘실체는 없지만 작용은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공의 의미’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실체가 없는 가상이다. 그러나 매트릭스는 엄연히
존재하며,그 세계 속의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바로 이런 걸
불교에서는 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공이란 ‘없다’는 무無의 의미가
아니며, 또 빅뱅 이전이나 우주의 종말과 같이, 원초적인 광막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공이라는, ‘실체는 없지만 작용은 있다’는 생각은
인도에서 숫자 ‘0’ 개념이발생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0은 그 자체로는
값을 가지지 않는다.그러나 다른 숫자와 결합하면 신묘한 변화를
부여한다. 일반적으로는 10배가 되고 곱하기에서는 존재를
무력화시킨다. 즉 ‘실체는 없지만, 작용은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이 세상 또한 시간의 흐름과 함께 계속해서 변해간다.
이 세계는 꿈처럼 변화 속도가 빠르지는 않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되돌릴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이 세계에도 역시
불변하는 실체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세계 역시
공이다. 그래서 ‘나는 공이기 때문에 존재하며, 공으로서 실존한다’는
명제가 가능한 것이다.
남녀가 처음에는 좋다가 나중에는 싫어지는 것은, 실체가 없는 공이므로
변화하고 그 속에서 작용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즉, 공이므로 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노력해서 자신을 바꾸는 것도 나태해서 퇴보되는 것도
역시 모두가 공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불교가 공을 말하는 것은, 허무를 말해서 집착을 여의라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보다 정확한 판단 속에서, 최선의 자신을
만들어 가라는 의미이다. 마치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가 매트릭스를
직시해서 자신의 능력을 끌어 올리고 매트릭스의 각성자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자현 스님–
실체는 없지만 현상이 적용되는 세계를 공(空)이라고 정의한다.
공은 없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현상으로 존재하면서 실체에 영향을
주는 ‘실체 아닌 실체’라는 이야기이다.
인도에서 처음 이 공의 개념을 수학에 적용한 결과, 영이라는
숫자를 도입했다. 영이란 없는 존재이지만, 없다는 개념의 존재가
실체가 되어서 적용된다는 이론이다.
이는 물리에서 미시세계(微視世界)를 설명하는 불확정성 원리와
같이 해답이 없다는 사실을 정의하는 것과 같은 이론이 되는 것이고,
이를 연구하기 위해 적용되는 것이 확률이론(確率理論)이 된다.
이렇듯 ‘없다‘라고 하는 실체 아닌 실체를 보여 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무라고 하는 글자의 의미가 된다. 없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에 우리는 이를 두고 역설이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일컬어 역설의 세상 또는 공의 세계
라고도 하는 이유는 겉으로는 실재하는 것 같지만, 이 세상에
찰나(刹那)의 찰나의 순간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영(0)이 스스로는 영향을 발휘하지 않지만, 더하고 곱하는 것으로
이웃과 관계를 할 때, 비로소 존재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은 우리
인생의 중요한 점을 가르쳐 주는 요소가 된다.
“보이는 세계가 허상이요, 보이지 않는 세계가 실상”임을 가르치는
중요한 핵심인 것을 깨달아야한다. 그래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
우주 진리를 여는 첫 단추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