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작은 한 알의 겨자씨, ‘우치무라 간조’를 생각한다!
가정은 행복을 저축하는 곳이지 행복을 캐내는 곳이 아니다.
얻기 위해 이루어진 가정은 반드시 무너지고, 주기 위해 이루어진
가정은 행복하게 된다. -우치무라 간조-
가정은 행복을 저축하는 곳이란다.
광산에서 금맥을 노다지로 켜 가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투자하고
수고하며 지키는 것이 가정이란 이야기다.
모으지 않고 소모하고 쓰는 것만 한다면 그 가정의 미래는 불
본 듯이 빤하지 않는가? 여기서 말하는 저축하는 가정이랴
서로 섬기며 배풀고 배려하는 교회 공동체 가정을 의미한다.
얻고자 하면 망하고, 주고자 하면 산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성경 말씀과 잘 일치한다.
우치무라 간조가 누구인가? 일본 기독교의 무교회주의 운동을
창시한 신학자이자 그리스도의 사상가다. 한국의 ‘행동하는 사상가’,
일생을 ‘싸우는 평화주의자‘로 살아오신 함석헌옹이 간조씨의 제자인
김교신으로 부터 소개 받아 영향을 받은 바 있다고 한다.
그는 혹카이도에 있는 삿포로 농과대학에서 대학을 책임지고 있던
‘W.S. Clark(“Boys Be Ambitious!” 로 유명)’의 기독교 정신의 영향을
받아서 미국 신학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일본으로 돌아 왔지만, 당시
일본의 군국화 시대에 제대로 꿈을 펼치지 못했고, 천황의 신사 참배와
같은 행사에 소극적인 자세로 대한다고 핍박을 받고 이후에 전적으로
기독교 운동에 헌신하게 되었다.
그가 이룬 업적을 한 마디로 ‘무교회주의 사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서양 중심의 기독교 사상을 일본화’ 시키기 위한 노력이었고,
그 중에 교단 중심적인 외형적인 교회와 형식적인 세례도 부정하는
내용이었다. 오직 ‘성경 말씀 중심’적인 철저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고, 현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도 지식인으로서의 비판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다.
당시 동양 평화론을 앞세워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 정부의 거짓
홍보에 대해서, 노일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동양평화를 위한
전쟁은 결국은 더 큰 전쟁(이차 대전)을 야기할 것이라고 비판한 글을
실었다. 그는 말과 글과 행동이 일치하는 신학자이면서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계몽 사상가였다.
간조씨를 ‘무교회주의’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잘못된 표현임을
잘 알 수 있다. 그가 주장했던 생각과 믿음은 교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가르치는 성경말씀 중심의 ‘참교회’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요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는 ‘코이노니아(Koinonia: 협동, 친교)‘,
즉 초기 그리스도인이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
실천을 위한 운동 과 동일한 생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교단과 교리, 외형과 형식과 전통과 기득권에 얽매여서 그리스도의
뜻이 세상적인 것으로 왜곡된 것을 바로 세우게 하기 위한 귀한
깨달음과 충정인 것을 왜 못 헤아리는가?
‘무교회주의’라고 했을 때, 과연 믿지 않는 사람을 위시해서 이 시대에
믿는 사람조차도 당장 이단이라고 정제할 수 있는 좋은 미끼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치무라 간조야 말로 지금까지 일본의 소수 기독교
성도들이 그 신실한 소수의 뿌리를 강건하게 연명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다.
보라! 지금은 일본 전 국민의 1~3% 의 비율로 근근이 기독교가
유지되고 있지만, 언젠가는 땅에 떨어진 작은 겨자씨, 우치무라
간조가 전 일본 국민을 창대한 하나님 백성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리라.
마치 중국의 작은 겨자씨, ‘워치만 니’와 ‘윗니스 리’가, 땅에 떨어져
죽어 지금의 지하교회가 번성하여 머지않아 영적 이스라엘의 창대한
자손이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국의 성도들이여, 우리 이제 긴 잠에서 깨어나 열방과 함께
천성문을 향한 힘찬 영적 행진에 동참해서, 영적 열두 지파의
마지막 남은 144000명의 영광을 함께 누려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