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사랑해야 할 건가?
니체는 “우리가 남을 사랑할 때는 남에게서 내가 필요한 희망 요소를
발견할 때이다(What is it that you love about others? My hope.)”
라는 이기적인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인간적으로 솔직하면서도, 세상적인 현상이 아니겠는가? 마는 기독교에서는 조금 다르게 남을
사랑하는 방법을 제시 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두 계명에서 이를 찾을 수 있는데,
첫 째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 번째는 여호와 하나님의 한량없는
그 사랑으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지요.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과 그의 모습으로
지으셨으나, 죄로 인해 잃어버린 그 모습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다시 회복해 놓았으니, 그로인해 우리 안에 심겨진 신의 성품을 사랑해야
하고 동시에 나 외에 이웃에게서도 그가 지니고 있는 신의 성품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안에서 사탄 마귀에 속아서 짓는 죄는 밉지만, 사람은 미워할 수
없는 것을 넘어서 우리 안에 있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고 있는 ‘참 나’를
찾아서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몸과 같이 남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니체가 이야기하고 있는 소위 ‘나를 위해 남을 사랑하는 것’은
나를 속이고 있는 자아 중심적 에고(Ego), 즉 나 아닌 나를 사랑하게
되는, 사탄의 속임수를 사랑하는 것과 다름이 없답니다.
[매우 좋은 말씀이시군요. 그리스도의 산상수훈과 같이 들리는군요.]
-안정석님-
산상수훈은 마지막 삼 년차 지도자 과정을 이수한 최고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수준 높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더라고요. 순교까지 할
수 있는 훈련된 제자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이 내용은 이미 구약
선지서에 나와 있는 내용을 더 깊이 있게 제자들에게 내용 분류해서
가르치신 내용인데, 구약의 내용에 입각해서 예를 들어 보면 심령이
가난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애타게 소망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천국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은 진리이신 예수님이시며 그분을
통해 자유함을 얻고 천국의 열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무엇으로 살 것인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랑할 것은 영의 양식인 하나님 말씀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