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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깨달은 후, 무엇이 달라지는고?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고, 그것으로 인한 열매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에서 구체적인 고찰이 소홀하다는 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소위, 깨달음을 얻었다는 분들의 글을 대하면서 그분들의 수고에 공감을 하면서도 깨달음으로 인해 도달할 수 있는, 살아서 얻는 열매(육적 영적 열매? 주님과 함께 하며 영광을 나누는 환희? 통찰력?)와 사후에 얻는 열매(구원, 의의 면류관?)에 대해서 늘쌍 고심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기독교에서 의미하는 깨달음의 경지에서 터득할 수 있는 유사한 설명이 해탈과 열반에 있어서 함께 나누고자 한다.

내세의 종교인 기독교와 달리, 불교는 현세 종교인 만큼,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깨달음의 의미를 통해서 기독교와 불교를 서로 비교 이해하는 좋은 체험을 경험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다르지만 그 서로 다른 것을 통하여 결국은 서로가 하나로 되는 과정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창조질서이고, 그 질서의 조화로움을 이해하고 깨닫는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일 것이다.

그래서 땅을 의미하는 구약이 있고, 또한 하늘을 의미하는 신약이 하나로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성경 66권이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실패 없는 완성이 없듯이 구약이 없는 신약은 없고, 땅이 없는 하늘도 없는 것이라 하겠다.

땅은 하늘로 가는 기반이고, 현세는 내세로 통하는 통로의 길을 마련한다.

땅과 하늘의 조화로움의 중심, 우주의 중심, 창조의 중심에는 사람의 존재가 있다. 그 사람을 중심으로 모든 창조의 의미는 유효하게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나, ‘신일합일”의 사상이 공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먼저,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이야말로 신의 모습을 지닌 창조 중심에 자리한 사람의 진정한 모습을 나타내는 제1 계명이 아닌가 한다.

“서로 사랑하면,

네가 나의 아들임을 알리라.”

♡도천 곽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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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과 열반의 참다운 뜻!)

1) 열반의 의미

수행을 통해 도달한 궁극적 경지를 불교에서는 해탈이나 열반이라는 말로 부른다. 해탈(vimoksa, vimukti)은 결박이나 장애로부터 벗어난 해방, 자유 등을 의미하고, 열반(nirvana)은 ‘불어 끈다(吹滅)’는 뜻으로서 번뇌의 뜨거운 불길이 꺼진 고요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 두 술어는 우파니샤드 철학이나 이 계파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것을 석가모니께서 불교 수행의 궁극적 경지를 표현하는 술어로 채택한 것이다.

불교의 여러 가지 수행법 가운데 십업설(十業說)과 사제설이 있다. 십업설에서 수행이 궁극에 이른 경계라면 십악업이 단절된 상태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십악업에서 근본이 되는 것은 세 가지 의업(意業) 즉 탐욕(貪欲, 욕심), 진에(성냄), 치암(痴暗, 어리석음)의 소위 삼독심(三毒心)이다.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은 의업이 밖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십업설(十業說)에서의 궁극의 경지는 탐, 진, 치가 사라진 상태라고 말해도 좋다. 궁극에 이른 수행의 경지는 탐, 진, 치가 사라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사과설(四果說)의 각 단계에서 단절되는 결박의 번뇌를 보면, 예류에서는 삼결(三結. 有身, 戒取, 疑)이 끊어지고, 일래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탐, 진, 치가 박약해지며, 불환에서는 삼결과 탐, 진(五下分結)이 끊어지고, 아라한에 이르러 탐, 진은 물론 치까지도 끊어진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열반은 그러한 탐, 진, 치가 영원히 끊어진 상태라고 설명되어 있다.

“열반이란 탐욕이 영진(永盡)하고 진에가 영진하고 치암(痴暗)이 영진한 것이니, 일체 번뇌가 영진한 것을 열반이라고 이름한다.”

<잡아함 권 18>

따라서 열반은 십업설과 사제설에 두루 적용될 수 있는 궁극적 경지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열반이란 개념이 갖는 본래의 뜻은 생사의 구속을 벗어난 해탈의 경계에 있다고 생각된다.

경전에 사용된 예를 보면, 열반은 대부분이 사제설과 결합되어 있으며, <잡아함 권 2> 사제설이 지향하는 바는 무명의 망념을 멸하여 생사의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는 데에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오온을 여실하게 아는 까닭에 오온에 불착(不着)한다. 오온에 불착하는 까닭에 해탈을 얻는다.”

<잡아함 권 15>

해탈에는 혜해탈(慧解脫)과 심해탈(心解脫)의 두 가지가 설해지고 있다. 혜해탈은 오온이나 십이연기에 실체가 본래 없는 것을 봄으로 지적(知的)으로 해탈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연기한 것이 무아라는 것을 직관하는 것(정견)만으로는 마음의 번뇌가 완전히 멸하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정정(正定)을 통해 마음에서 그것을 멸해야만 한다. 이것이 심해탈이다.

열반은 이러한 두 가지 해탈이 갖추어 질 때(俱分解脫)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열반은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난 세계이다. 그 곳에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무상함은 없다.

“유위(有爲)에는 생주이멸이 있지만 무위(無爲)에는 생주이멸이 없다. 이것을 모든 행(行)이 적멸(寂滅)한 열반이라고 한다.”

<잡아함 권 12>

“오든 행은 무상하니 그것은 생멸의 법이다.

생멸을 멸해 버리면 적멸은 즐거움이 된다.”

<잡아함 권 22>

불교에 있어서 열반은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삼법인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셋에도 이를 포함하고 있다.

2) 열반의 바른 이해

열반은 불교 수행의 최고 경지를 표현하는 말이지만, 그 언어적 인상은 적극적이라기 보다는 소극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생의 맹목적 의지라고 할 수 있는 탐, 진, 치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불교에서는 열렬한 구도를 위해서 재가(在家)보다는 출가(出家) 를 권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불교는 염세 종교 라든가 허무적멸(虛無寂滅)의 도(道) 라는 평을 종종 들어 왔다.

그러나 이런 비판이 과연 열반의 참다운 뜻을 이해한 것일까. 선과 악은 성질이 상반하므로 한 인간의 행위에 동시에 나타날 수는 없다.

악이 행해지고 있을 때는 선은 있을 수 없고, 선이 행해지고 있을 때는 악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선과 악의 이러한 상반성은 악을 끊으면 곧 선이 되고 선을 끊으면 곧 악이 된다는 판단을 끌어낸다.

불교의 열반은 탐, 진, 치라는 세 가지 악한 의업이 멸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그 곳에는 무탐, 무에, 정견(無痴)의 세가지 선한 의업이 곧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열반의 언어적 표현은 비록 소극적이지만 사실은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열반의 적극적 의미에 관한 이러한 해명에 대해서 다시 다음과 같은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선과 악의 중간 상태 즉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無記)의 상태가 있을 수가 있으니, 열반은 바로 그러한 비활동적 중간 상태가 아니겠느냐고. 이런 견해도 불교의 십업설(十業說)에서 말하는 선악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십업설(十業說)에서는 선악의 중간 상태를 시설함이 없이 선악을 완전히 상호 대립적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불교에서 십선업을 따로 시설함이 없이 십악업의 반대 개념을 갖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데서 엿볼 수가 있다.

즉 십선업은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 불망어(不妄語), 불양설(不兩舌), 불악구(不惡口), 불기어(不綺語), 무탐(無貪), 무에, 정견(正見, 無痴)의 열이라 설하고 있다.

<잡아함 권 15>

따라서 십악업의 멸(滅)은 곧 십선업의 발생을 의미한다. 열반의 이러한 적극적 의미를 우리는 사제 팔정도에서는 더욱 뚜렷이 할 수가 있다.

팔정도가 완성된 아라한의 경계에서는 탐, 진, 치의 일체 번뇌가 영진(永盡)한다고 한다. 이것 또한 무탐, 무에, 정견의 발생을 의미함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사제의 집제와 멸제는 십이연기의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에 각각 해당되는데 십이연기의 최초에 위치하고 있는 무명은 명과 정반대의 개념이다. 따라서 무명의 멸진은 곧 명(明)의 발생으로 전환하며, 우주적인 대아(大我)의 눈부신 활동이 거기에 전개될 것이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낭요(朗燿) 하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석가모니께서는 초전법륜경 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내가 사성제에서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을 함에, 눈이 생하고 지(智)가 생하고 명(明)이 생하고 각(覺)이 생 하였다.”

<잡아함 권 15>

열반의 적극적 의미가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열반은 또 인간의 사후에야 실현되는 경계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경전에도 석가모니의 죽음을 반열반(般涅槃, parinirvana. 圓寂)이라 한다. 반열반은 완전(pari-)한 열반이란 뜻이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사후에 대해서 어떤 설명을 해주고 있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십업설에서 선업은 선취(善趣)에 악업은 악취(惡趣)에 수생(受生)한다고 설하고 있다. 그러나 생사에 결박하는 근본 무명을 단절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 그러한 사람에게 현생에 있지 재생이 있다고는 못할 것이다.

“내 생은 다했고 범행(梵行)은 섰으며 할 바는 하였고 후유(後有)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자증(自證)의 선언(記別)이 경전에 수 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반열반은 바로 이러한 도인의 죽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반열반이 죽음을 가리킬 경우는 이차적 전용에 의한 것이지 그 본래의 뜻은 아니다.

“열반의 참다운 뜻은 현재의 상태에서 생사로부터의 해탈을 그대로 체득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라한은 “현법(現法)에서 해탈한다”고 설해져 있으며, 석가모니께서는 다음과 같은 교설을 베풀고 계신다.

“현재의 법에서 반열반함이란 늙음, 병듦, 죽음을 염리(厭離)하고 욕심을 버리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잘 해탈하면 이것을 이르되 현재의 법에서 반열반을 얻었다고 한다.”

<잡아함 권 15>

모든 악이 멸하면 일체는 선이 되고 모든 사(邪)가 파(破)하면 일체는 정(正)이 된다.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였던 일체는 곧바로 상(常), 락(樂), 아(我)의 일체로 전환한다. 열반은 바로 이러한 세계관의 전개, 생명의 약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송영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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