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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7:2의 의미?

“창세기 7장을 묵상했어요. 요즘 사람 사는 세상이 하도 복잡하고 질서가 혼돈스러운 것 같아 “대홍수” 이야기를 읽고 잠시 묵상을 했어요. 대홍수 이야기를 묵상한 후 이와 관련한 명화를 찾던 중 이전에 보았던 그림들과는 다른 기법으로 표현한 그림들이 있어 포스팅했어요. 위쪽 그림은 Edward Hicks (1846)의 작품으로 ‘Noah’s Ark’ 입니다. 그리고 아래쪽 그림은 Francis Danby (1840) 의 ‘The Deluge’입니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위쪽 그림에서 작가는 동물들이 질서 정연하게 방주로 들어가는 장면을 그림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세계가 담고 있는 평온함과 고요함을 보여주는 것 같군요. 그리고 아래쪽 그림은 위쪽의 질서의 평온함과는 대조적으로 무질서(chaos)와 대혼란을

보여주는 것으로 작가는 이 그림을 통해 홍수와 같은 자연의 힘 앞에서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암시하는 것 같군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의 삶의 평온함,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무력함이 잘 대조 되는 작품입니다.”   -Young Ho Jung 목사님-

정결한 짐승(Clean Beast) 암수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Unclean Beast) 두 쌍씩 실었고 공중의 새도 일곱 쌍을 실었다고 했지요. (<창세기 7:2-3> 참조)

하나님 관점에서 정결한 짐승이 무엇이고 부정한 짐승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죄와 관련 없을 것 같은 짐승도 정결과 부정으로 구별하신 기준이 과연 무엇일까? 어차피 부정한 사람을 심판하신 하나님이 무슨 이유로 짐승은

부정함에도 7:2의 비율로 구원을 이루게 하셨을까? 7:2의 비율의 의미는?

노아 방주 그림에서 다른 동물과는 다른 자세를 취하는 동물들이 눈에 띱니다. 사자와 호랑이가 대표적인데, 둘 다 뒤를 돌아보고 있다는 거지요.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은 사람을 포함해서 이들도 홍수전에는 모두 풀을 먹는 초식 동물이었는데, 홍수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락 하셨는데, 짐승 중에 육식을 한 것들이 부정한 종류로 분리된 것은 아닌지?

마지막으로, 공중에 나는 새는 일곱씩 암수를 골랐다고 하니, 아마도 부정한 짐승으로는 분류가 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새에 관한 내용에서, 일곱의 숫자와 부정한 종류로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이유인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합니다. 곡신 같은 낱알을 먹는 초식하는 새와 벌레를 먹고, 그 중에도 부엉이와 독수리는 육식을 주로 하고 있지요. 

7:2의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의 황금비율, 하나님이 무엇을 우리에게 교훈을 주실려고 계획하시고 예비하신 것일까요? 여기서 깨끗한 것과 깨끗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도 인간과 달리, 신의 유전자도 포함되지 않은 모든 짐승을 대상으로 여길 때 무엇을기준으로 구별하셨을까요? 

우선, 짐승이라고 했을 때, 창세기 초입에 등장하는 뱀을 먼저 상기해야 할 것 같네요? 하나님의 약속을 업신여기도록 유혹한 뱀이야말로 완벽한 깨끗하지 못한, 부정한 짐승의 좋은 예가 되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등장하는 뱀은 당연히, 육적 언어의 의미라기보다는 영적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되는 바, 우리는 뱀을 사탄 마귀의 존재로 여길 수 있다 하겠다.

그러면, 창세기 노아의 방주 사건에 등장하는 짐승들의 존재를 어떻게 여겨야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만약, 육적 세상 존재로의 가축이나 짐승으로 해석한다면, 사실,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과연, 하나님 관점에서 어떻게 짐승을 정결함과 부정한 짐승으로 구별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정결과 부정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죄의 문제이고, 죄의 문제라면, 생각이 없는 짐승들에게 무슨 죄라는 개념을 세울 수 있겠는가? 없다가 답이다.

그렇다면, 짐승도 창세기의 뱀과 같은 영적 기준의 의미로 접근해야할 것이고, 또한, 노아의 방주 사건도, 마찬가지로 육의 언어가 아닌 하늘의 영적 언어로 접근하고 또 해석해야한다는 모순점에 다가가게 된다.

그렇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육적 언어로 접근해야 한다는 가정에서는 깨끗하고 깨끗하지 않다는 기준은 단순히, 사람이 섭취하기에 부적합한 음식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예를 들어, 성서적으로는 비늘없는 생선이나, 돼지고기 등은 부정한 음식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주로 바다에서나 육지에서나 부패된 쓰레기 등을 처리하는 짐승등을 일걷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먹기에 유익한 정한 짐승과 먹기에 거북한 짐승 간의 비율을 잡는다면, 대강, 7:2의 비율이 잡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안응 곽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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