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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剽竊)과 예수님, 누구를 위해 하느냐에 달려 있다!

요즘 유명 인사들에 대한 표절 시비로 사회가 한동안 시끌벅적했다.

남의 글을 뚜렷한 인용표기 없이 가져다 자기의 아이디어인 양,

학위 논문이나 실적 논문에 사용했다는 이야기이다.

마찬가지로 유명인사로 인해 사회가 떠들썩하게 된 경우가

전 청와대 윤모 대변인의 워싱턴에서의 성추행 사건이다.

‘표절’과 ‘성추행’ 관련 사건의 공통점은 유명인사가 개입된 것이고

다른 현상 하나는 서구와 우리와의 ‘전통과 문화적 차이’

때문이란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우선 논문 표절의 경우를 살펴보면, 동양에서는 논문이라는

형식적인 발표문화에 익숙해 있지 않다. 학위와 실적이라는

것들도 모두가 서양의 평가문화로부터 도입이 된 것이어서

자기를 들어내고 싶어 하지 않는 유교문화에 젖어 있는 우리는

서양의 비판 문화의 시스템에 적응이 되지 않은 지금까지 여러

부작용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는 실정이다.

‘갓 쓰고 양복 입은 양반 형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우리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어쨌든 논문은 써야 하겠고,

쓸 것은 별로 없는 상황에서 논문의 형식과 분량은 채워야지

논문의 체면이 세워진다고 하기에, 자연히 상황을 부풀려

표현해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게 마련이다.

외국논문의 경우를 살펴보면, 특성상 두 가지 면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논문의 ‘형식’과 ‘독창성’이다.

논문 형식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기 위한 공통사항의 기준,

즉 ‘논문의 보편화 내지는 표준화’에 대한 요구가 충족되어

져야 하는 것이고, 논문의 독창성은 논문의 본래의 목적인

발표자만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논문 내용과 차별화 되는

발전된 고유의 내용을 이야기 하고 있다.

유감스러운 것은, 우리의 논문에 대한 자세는 이 두 가지

중요 요소에 대해서 작지만, 오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우선 남을 배려하기 위한 글로벌 표준화 형식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고, 두 번째는 독창성을 나타내기보다는 체면을 세우기

위한 허례허식에 치중한다는 사실이다.

질보다 양에 치중하게 되다 보니, 남의 것도 분별없이 주저리

주저리 주어 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남의 내용을

인용했다는 내용 자체가 그렇게 독창성 있는 내용을 몰래 훔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죄의식이 없는 이유가 된다.

독창성이 있으면, 한 페이지면 어떤가?

내용 전달이 되고. 형식에 맞으면. 양이란 전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실천하면, 아마 표절이라는 구속에서 자유롭게

될 것이리라.

성추행(性醜行)의 내용도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한국의 남성우위의

갑과 을의 밤 문화‘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은 ’선진 외국의 여성

우위에 따른 평등 사회의 법문화‘에 대해서 잘 이해를 못한다.

더구나 대사관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한국 교포 여학생의 입장

이었기에, 여전히 한국의 못난 남성의 밤 문화 구습의 작태를

벗어나지 못 한 일례가 된다 하겠다.

표절의 정의는 누구를 위하여 저질러졌는가?

에 기준이 있지요.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들의 기준도 표절의 기준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누구를 위하여 표절하는가?

누구의 영광을 위하여 믿는가? 에 따라서 표절인가,

그리고 예수님을 진정 믿는 사람인가를 구별할 수 있다.

예수님 믿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표절과도 상관이 없게 되는 높은 권세를 받게

된다. 그것을 왕 같은 제사장의 권세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 한다면,

모든 것의 소유주 이신 하나님의 창조물은 또한 그 아들 되는

우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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