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영원한 보상(報償)!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 홀로서기 1 (서정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시인이 노래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 마음속에서 그리움이 사무쳤을 때 피를 토하며 바위를 징으로
쪼면서 뱉어 내는 나이팅게일의 눈물을 머금은 노래 소리가 아니던가?
기다림은 조건이 없이 모든 것을 믿고 생사를 걸고 하기에 자존감
(自存感)이 서려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는 그런 시시한 것이 아니기에 무엇인들
가리고 마다하며 여유를 부리겠는가? 그리움은 이렇듯 치열하고
단호할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리움은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고 단순한 말이 아니다.
말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말이 아니듯, 그리움의 말은 정도가 없다.
그 속에는 광대한 우주의 메타포(Metaphor)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움은 그냥 내뱉는 감정도 아니요, 낭만도 아니다.
거기에 절대 절명의 도박(賭博)이 있고 자존심(自尊心)이 있다.
그 간절한 표현이 바로 시인이 고백한 내용,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우회적인 표현 방법을 사용한 것이리라.
기다림은 분명한 만남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변명이 절대로 없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을 기다리면서,
수많은 지구에 사는 믿음의 백성들은 그 약속 하나를 붙잡고 2000
수 년 동안 다시 만날 그날을 이제나 저제나 하고 손꼽아 기다려 왔다.
그분의 재림(再臨)을 열망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천국의 구원이
허락된다는 그분의 말씀을 붙잡고 오늘도 그분과의 분명한 만남을
목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기다림을 인내한다. 그 만남은 죽어서도
기다림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영원한 약속 안에서 유효하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만남의 대 서사시인가?
죽은 자는 첫 부활을 통해서 만남을 이룰 것이요,
산자는 들러서 만남을 이룰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