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빌리 엘러지!
“난 <힐빌리의 노래>
저자, 밴스의 트럼프화가 그리 놀랍지 않다.
이미 그런 사람 많이 봤어.
윗 세대 혹은 386에 유년시절 가난했던 사람 무지 많잖나. 이들만큼 부를 동경하고 쫓아가는 사람들을 못봤어. 물질에 첨착하는 유년기 결핍은 아무리 많이 가지고 누려도 벗어나기 힘든 듯 해.
가난해봤으니 가난한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더 잘해줄 거라고? 아니, 자기 결핍 때문에 쫓아가느라 늘 여유가 없다니까.
학부 때 정말 너무너무 돈이 없는데 힘들게 굶어가며 유학 갔다온 교수님이 계셨어. (석사 유학만) 그분이 말한 게 안 잊혀져.
한국서 땟국물 줄줄 흐르는 애들만 보다가 유학 가서 어느 초등학교에서 애들이 나오는 거 봤는데 금발에 파란 눈에 온갖 알록달록한 옷에 깨끗한 아이들이 우루루 나오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울었대. 이 사람 뇌리에 새겨진 이 강렬한 동경 이거 절대 없어지지 않아.
그리고 바로 이 교수님이 내가 대학원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뭐하시냐고 물었던 분이시지. 회사 다니신다고 하니까 나한테 그냥 시집이나 가라고 했어. 그런데 전혀 공부 생각이 없는 대단한 집안 딸에게는 너는 공부하라고 그러더라.
본인이 너무 고생해서 딴에는 나를 생각한다고 해준 말일수도 있어. 하지만 두 학생을 바로 옆에 두고 할 말은 아니지.
그때 알았어. 물질에 맺혀서 평생 산 사람들은 평생 물질의 노예라는걸. 더 가진 자를 끊임 없이 동경하면서 멈출 줄 모른다는 걸.
힐빌리 밴스도 그런 거지. 이게 이 사람이 가진 일관성이야. 자기 내면에 깊은 홈을 판 유년시절 결핍에서 벗어나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려면 얼마나 힘든데. 거듭 나지 않는 한 어려워.
덧. <하틀랜드>가 더 낫다. 비슷한 화이트 빈민층 출신 여성이 쓴 글인데,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이 저자는 자기 아픔에서 가로지르기(crossing)를 하더라고. 자기 아픔에서 손을 뻗어 타인을 안아줘. 우리에겐 이게 필요해.”
-조이스 박님-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힐빌리의 내용도 그렇다할 수작은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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