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광주의 참상은 6.25에서 비롯되었다!
-무송 현준호-
광주의 비극, 대한민국의 비극이다.
여전히 광주는 5.18의 깃발을 휘날리는 계기로 대한반도의 붉은 섬으로 달려가고 있다.
과거 잠시동안 점령했던 북한 점령국과 빨치산 게릴라들의 혼이 남아 여전히 광주를 다스리는듯 빨강색과 까망색으로 광기어린 혼을 흔들고 있다.
거짓과 음모와 어둠의 자식들이 빛의 광주를 공허한 흑암의 도시로 거슬러 끌고 나가려한다.
세계 선진국으로 발돋음하려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애써 부인해야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과거 6.25 민족 상잔의 원인인 북한과 중공의 존재감 때문일 것이다.
‘정치’라는 이름으로 오로지 ‘정권 탈취’와 ‘장기 집권’이라는 헛된 이름으로, 빛으로 나아가려는 대한민국을, 혼란과 혼돈의 시대로 되돌리려는 포악한 시도는 국민의 이름으로 단호히 단절시켜야 할 것이다.
♡도천 곽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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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전라도 땅에서 먼저 깨어난 분들의 삶을 그린 대하로망 소설 《등불》
제 1편: 「현준호와 현정은」
무송(撫松,1889∼1950)은 현준호의 호다.
‘소나무를 어루만지다’는 뜻이다.
撫松이 진정으로 어루만지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송은 독립운동가에게는 독립자금을, 가난한 사람에게는 밥을, 기술이 있으면서도 자금이 없는 자에게는 자금을, 모든 방면에서 도울 수 있는 것은 가리지 않고 도왔다.
무송은 많은 화가, 서예가들의 그림도 사주었고, 당시 의재 허백련 화백의 개인전 발기인이 되어 현 광주은행 2층에서 개인전을 열고 친구들에게 구입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무송은 바둑과 담배(朝日), 맥주를 즐겼고, 젓갈을 좋아했다.
밥상에 젓갈이 오르면 친구, 손님들에게 일일이 젓갈의 생산지, 담그는 법, 妙味 등을 자상하게 설명해주었다.
6·25, 광주에 떨어진 슬픈 별들
운명의 시간
1950년 9월 28일.
13일 전 인천으로 상륙한 유엔군에 의해 서울이 탈환된 이날 새벽 4시의 광주는 조용하기만 했다.
80년 5월 광주 그날의 새벽처럼.
아직 가을인데, 새벽바람은 일찍 겨울을 알렸다.
무송의 첫 부인 김희정은 동경에서 미술학교를 다녔다.
대학시절 만났던 첫사랑 김희정은 아들 땉 낳고 살만하게 살림이 펴니 백일해에 걸려 먼저 갔다.
평산 신씨 신종림 새 부인은 참으로 얌전했다.
먼저 간 첫째부인의 제사를 정갈하고도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어제는 김희정의 제삿날이었다. 김희정이 그린 그림을 잠결에서 만나다 밖을 보니 낙엽이 제법 떨어 져 쌓이고 있었다.
끌려와 감옥에 갇힌지 며칠 째, 잠이 어렴풋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어디에선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현 준호, 현 준호.”
벌떡 일어났다.
“현준호, 어디 있나, 석방이다.”
“석방이라니?”
“그래 석방이다. 이 쪽으로 나오라.”
간수의 재촉에 반신반의하며 일어선 무송은 꿈인가 생시인가 하였으나, 의문도 났다.
새벽에 석방이라니 무언가 이상했다.
그러다 석방의 기쁨에 같이 갇혀있던 다른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깨워 가족들에게 전할 말을 물었다.
밖에 나가면 궁금해 할 수감자 가족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여러분들, 나 먼저 나가게 돼 미안하오, 혹시 가족들에게 안부 전할 사람들 있으면 나에게 말해주십시오.”
무송은 같은 감방에 수감되었던 인사들에게 인사를 나누며 간수를 따라 형무소 앞마당으로 나왔다.
형무소 앞마당에는 이미 60∼70명의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포승줄에 묶인 채였다. 무송의 눈에 초대 군정지사를 지낸 최 영옥의 얼굴도 얼핏 지나갔다.
형무소에 처음 수감 시 최태근(전 광주중앙여고 이사장)과 같은 방에 들어갔으나 그 후 갈라져 서로 소식을 모르던 터였다.
“에-, 여러분 그동안 고생이 많았습니다. 곧 석방을 시켜드리겠습니다. 석방에 앞서 형무소 농장에서 한 가지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우선 그 쪽으로 갔다가 일을 마친 뒤 자유의 몸으로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드리겠으니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형무소장은 여느 때의 패기어린 목소리와 다른, 음울한 회색하늘 같은 목소리로 떠나는 이들을 전송해주었다.
형무소 농장으로 끌려가는 우익인사들 주변에는 총과 죽창을 든 인민군들이 호위를 하며 따랐다.
무송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감을 느꼈다.
형무소장의 풀죽은 모습은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된 데서 오는 것이라 하겠지만, 석방을 시켜준다고 새벽부터 끌고 가는 게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무등산의 여명 속에서의 맞이한 농장의 참극
무등산 쪽으로부터 희뿌연 기운이 번져왔다.
무송은 마지막인줄도 모른 채, 무등에서 드리워지는 빛줄기를 눈이 시리게 바라보았다.
“모두 들 한 줄로 서서 눈앞에 보이는 창고 속으로 들어가시오.”
아무 생각도 없이 창고 속으로 들어갔다.
“죽여라.”
이때 갑자기 명령이 떨어졌다.
“타당탕-.”
총소리에 이어 죽창과 곡괭이, 대검, 삽을 뜬 빨치산들이 창고 속으로 한 무리 달려들어 우익인사들을 향해 닥치는 대로 찌르고 내리치고 후려쳤다.
창고 속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장소로 변했다. 피를 토하는 사람들이 자운영 꽃잎처럼 몸뚱이가 떨어져 나갔다.
손에 묶인 인사들은 반항한 번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공산군의 무자비한 학살은 거의 1시간 동안 恣行됐다. 미처 숨이 끊어지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선 대검이 마지막을 확인을 했다.
광주에서 벌어진 9월 28일 학살은 이렇게 이뤄졌다. 무서운 참극이었다. 우익인사들에 대한 집단 학살을 마친 빨치산들은 서둘러 입산했다.
그 날의 광주 하늘
광주시가지는 조용했다.
아침의 참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벽은 물러나 아침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새들만 거세게 울어댔다.
공산군들의 이동이 눈에 띄었다.
무송의 노모 곽 씨 부인이 숨어있던 학동(鶴洞) 玄文星의 집 앞 쪽으로도 軍葬을 한 인민군들이 지나갔다. 무등산 쪽으로 내빼는 듯했다.
하오 4시께가 되자,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까마귀가 광주천변에서 울어댔다. 매우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느낌이 들자 4남 永國이 혼자 호남동 집 쪽으로 달려갔다.
집안은 폐허가 되어있었다.
점심을 먹다 도망쳤는지, 숟가락이 밥 속에 꽂혀있었고, 넓은 집 문들이 모두 다 떨어져 마당에 나뒹굴고 있었다.
저녁 7시께 먼 데서 함성이 들려왔다.
함성이 놀라 대문 밖으로 뛰어 나온 영국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합니까?”
“형무소를 부수러 가지고 합니다. 인민군들이 지키고 있어 저렇게 소리를 지르고 있답니다.”
아버지, 어디 계시나요?
영국은 이 말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광주형무소(현 전남여고 개천 뒤쪽)로 달려갔다.
형무소 앞에는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려 형무소 문을 열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이 함성이 호남동 집까지 들렸던 것이었다.
눈에 핏발이 선 우익인사 가족들은 마지막 남은 인민군들이 일렬로 총을 겨누고 있는 데도 형무소 문 쪽으로 몸을 밀치고 들어갔다.
이 밀치기는 밤 11시가 됐을 때 형무소 문을 부수고 말았다.
광주시민들은 몽둥이를 들고 도망치는 인민군을 쫓았다.
밤11시가 다 되도록 영국은 무송을 찾아 뛰었으나,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가족들은 난리가 났다는 것을 알고 호남동 집으로 모두 돌아왔다. 무송이 잡혀갈 즈음, 같이 감방에 수감된 金 三洙( 전 전남도 양정과장, 作故)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은 사람을 보내 소식을 물었으나 모른다는 답변에 속이 타들어갔다.
뜨 눈으로 28일 밤을 새운 가족들은 다음 날 형무소를 두 사람 씩 짝을 지어 무송을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형무소 농장, 화순 송정리 쪽으로도 사람을 보냈으나, 소식은 빈 골골을 맴돌다 오지 않았다.
찾고 또 찾았다.
현장을 뒤지다 최영욱 가족들이 대성통곡을 하면서 시체를 찾아 리어카에 실어가고 있었다.
“울 아버지 못 봤나요?”
” 못 봤다.”
영국은 피 냄새가 범벅이 된 창고 속으로 들어가 하나하나 시체를 들추기 시작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 부지
삼베옷 소매가 시체 속에서 삐죽 나와 눈에 띄었다.
순간 가슴이 막힌 영국은 삼베옷 위로 쌓여진 시체3구를 끄집어 내렸다.
부친 무송이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피투성이가 되어 숨져있었다.
“아버지–”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무송은 오른쪽 심장부분에 대검을 맞고 숨져있었다.
형무소 수감 시 면회를 갔다가 면회를 못 하고 돌아오면서 차입한 삼베옷을 입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가족들은 무송이 시체로 누워있자, 대성통곡을 했다.
평산 신씨 조백한 집안 출신의 부인 신 종림은 무송의 가슴이 아직 뜻뜻 하다 고 의사를 부르라고 외치다 쓰러졌다.
그러나 한 번 간 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2024. 7.18. 03.13∼04.01. 물봉 신광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