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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오해와 진실(V)

(1)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

<산상수훈>

“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나는 가수다’는 제목에 걸맞게 가수라고 자부할 수 있는 라이브 가수 7명을 뽑아서 순위를 매기고는 맨 마지막 순위에 걸린 사람을 탈락시켜가는 TV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나의 가수됨이 가수를 결정하는 줄 알았지만 가수의 자격은 전적으로 대중의 취향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본질도 이와 같아서 성도의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 은혜로 얻습니다.

아담 안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세상의 왕이니까, 나는 하나님처럼 된 존재니까 나는 구원 받아야 된다고 너스레를 떨고 있는데 극히 소수만이 구원이라는 울타리 속으로 초청을 받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영광을 더욱 높이고 드러내기 위한 전쟁이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지요. “나 예수 믿었다”의 전쟁이에요. ‘나 믿었어’

‘나 자격 있어’의 전쟁이 울타리 안, 교회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쟁이 진행되면 될수록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영광은 내가 개발하고 투쟁하고 쌓아서 빚어내는 게 아니라 ‘나’라는 존재 밖의 어떤 분에 의해 결정되고 주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성도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점점 발전하고 개발되고 성숙되는 자신을 감지하기 이전에 하나님 은혜가 아니면 존재도 없다를 먼저 배우게 되는 거지요. 그게 바로 심령의 가난함입니다.

수없는 탈락의 경험이 그에게 닥쳐야 하는 것이고, 그때마다 성도는 나의 노력과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 선물로 주어진 거구나하는 자기부인의 고백을 하게 되는 거지요.

나의 믿음이라는 것, 나의 신앙인 됨. 성도됨은 나에게 사유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어주시는 거구나. 믿음이라는 것, 신앙이라는 것, 저수지처럼 품어서 내가 사유해서 언제든지 원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늘에서 쏟아 부어지는 거라는 사실. 하나님 은혜가 끊어지면 거기서 허무한 인간으로 전락 되는 거지요.

우리는 사람에게서 자격을 찾으려 하지요.

자기가 설정해 놓은 기준에 못 미치면 저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해 버려요. 그건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심령이 가난함’은 나의 영적 가난함을 감지하고 인정하고 수긍하는 것으로 “내 안에서는 죄 밖에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지요. 그걸, 심령의 가난함, 마음의 가난함 이라 합니다.

하나님 도우심이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임을 확실하게 자각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가장 먼저

“복 있는 자여 그대는 심령이 가난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는 건 우리 성도의 신앙생활의 본질과 핵심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복 받은 성도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밀려가게 되는 목적지가 바로 ‘심령의 가난함’이라는 거지요. 그건 육적 인간의 죽음의 목적지입니다.

많은 분들이 ‘심령의 가난’을 겸양의 미덕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욕심을 버린 겸손한 마음’ 뭐 이정도로 이해를 해요. 그런 것들은 사람이 가르침을 받고 훈련으로 익히면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리고 그런 것들은 다른 종교가 더 열심히 추구하고 수련하는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걸 수련을 통하여 성취해 내기도 합니다.

불교의 ‘공’이 바로 그런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공허한 것으로 물질 세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이웃을 선대하며 욕심을 다스려 해탈에 이르자는 게 불교의 ‘공’ 사상이지요. ‘심령의 가난함’은 ‘공’이나 ‘겸양의 미덕’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여기, 가련하고, 가난한 자들이 나오는데 그들이 갈증이 나고 혀가 마르고 배가 고파서 부르짖을 때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시는데, 20절에 “그들이 여호와를 창조주로 인정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지어진다” 는 걸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답합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손에서 시작되고 완료된다”라는 걸 알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가난하게 하고 응답한다는 거예요. 내가 그들을 가난하게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이 의미는 가난한 자들만 찾아가서 구하겠다는 게 아니라 내 백성은 이미 묵시 속에 완료가 되어 있기 때문에, 내 백성은 이 역사 속에 보내서 반드시 심령이 가난한 자, 목마른 자로 만들어 내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이 자신의 신앙 여정을 통해서,

내 힘과 능력과 공로로 성도가 되는 게 아니라, 외부의 평가단에 의해서 성도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피동적 존재구나 라는 것을 알고, 그 외부의 주권자와 평가자의 능력과 영광을 인정하고 그 앞에 항복하는 자가 되라고 마음을 가난하게 빈핍하게 만드신다는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은 예외없이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모든 성도의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나는 내 의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선물해 주신 의로 사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들의 심령을 가난하게 밀고 내려가는 거지요.

하나님 의가 내안에 가득 차야 된다 라는 건,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고백이지요.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고백이 심령의 가난이란 말입니다.

“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사야 61:1~3>

여호와께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신 아름다운 소식은 Good News, 복음입니다. 3절에 그들에게 여호와가 심으신

의의 나무, 그의 영광을 여호와의 열심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신령한 복으로 복을 주신 당신의 백성들을 이 역사 속에 내려 보내셔서 심령이 가난한 자로 만드시는 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영광만을 찬송하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다는 거예요.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가난한 심령의 자리로 끝없이 밀려내려 가게 되는 거지요.

에베소서에 우리의 구원의 목적이 하나님 은혜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고, 이것은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전혀 아무것도 기여를 할 수 없었다 라는 것을 인정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창조의 시작이며 끝이란 뜻이에요)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이사야 66: 2-3>

마음이 가난한 자와 제사를 열심히 행하는 자가 대조되고 있는데 하나님은 제사를 형편없고 더러운 것으로 평가를 하세요. 이렇게 모든 창조가 하나님의 손에서 시작이 되어서 완료가 된다는 걸 인정하는 자가 마음이 가난한 자이고 하나님은 바로 그 마음이 가난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거지요. 성경에서 그렇게 자신의 심령의 가난함을 처절하게 경험한 사람을 예를 들어 봅니다.

“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 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시 40: 17>

다윗의 시편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이 시편을 썼을 때도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신을 가리켜 가난하다, 궁핍하다 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여기서 가난은 물질적인 가난이 아니라 마음의 가난을 가리키는 것이겠지요. 다윗이 자기는 마음이 가난한 자라 그러면서 ‘나를 도와주시고 나를 건져 주세요’라고 부르짖습니다.

어디서 건져 달라는 것입니까?

죄에서 건져 달라는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입니다. 다윗이 왜 이런 부르짖음을 토해내게 됐을까요? 시편 51편으로 가면 다윗의 심령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가난하고 궁핍하게 되었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시 51: 1-4>

계속 죄가 나오지요.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다윗의 시편인데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면서 아이를 낳은 후에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살고 있었는데 나단 선지자가 와서 그의 죄를 낱낱이 드러내 버렸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실체를 올바로 직시하게 되고 자각하게 되면서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음으로 도움을 청하는 그런 시편이에요.

1절부터 3절 사이에 하타아( חטאה/ H2403 )와 폐솨( פשׂע/H6588 )라는 단어가 번갈아 쓰이는데 다 ‘죄’ 예요. 하타아( חטאה/ H2403 )는 복수이고 폐솨(פשׂע /H6588 )는 단수에요.

그리고 그 다음에도 헤트(חטא/ H2399 )나 아본(עווֹן/ H5771)같은 단어들이 죄’라는 단어로 번갈아 여러 번 나오는데 그 단어들도 단수로 쓰였다가 복수로 쓰였다가 해요.

다윗은 지금 사건화 되어서 밖으로 터진 죄들, 죄의 증상들은 죄들의 뿌리인 본질적인 죄, 단수로그 죄를 따로 구별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요.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충신 우리아를 죽인 죄들, 그 죄들에 대해서도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고 있지만 자신의 본질과 속성을 채우고 있는 근본적인 그 죄를 직시하고 무서워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이 죄의 원인이었구나를 알게 되었어요.

2절에 보시면 다윗이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고 나의 죄를 깨끗게 해달라고 읍소를 하는 데 거기에 쓰인 죄라는 단어들이 전부 단수에요. 그리고 3절의 죄는 복수이고 ‘내가 항상 죄 앞에 있습니다’ 에서 죄는 또 단수에요.

지금 다윗은 자신의 삶 속에서 사건화 되어 터진 ‘죄’들을 통해서 그건 세상 율법이 죄라고 합의해놓고 정의해 놓은 그런 것이고, 그런 죄들을 통해서 자신의 근본적이며 속성적인 죄, 즉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본질을 직시하게 되었고 그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하나님께 해결해 달라고 부르짖는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심령의 가난함’이란 말입니다. 다윗의 범죄가 도구로 쓰인다는 의미입니다.

4절에 보시면 ‘내가 주께만 범죄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서 쓰인 단어도 단수에요. 우리에게서 사건화 되어 밖으로 나오는 그런 죄의 증상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되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된 것들을 죄는 핑계를 대거나 사과를 하거나 반성을 해서 해결 방법 모색이 가능한 것으로 그 죄들은 실제로 다윗이 우리아를 살해 한 것이 아니라 암몬 자손의 칼이 우리아를 죽인 것으로 변명할 수 있지요. ‘내가 언제 죽였어’라고 하면 끝나는 거예요.

밧세바의 목욕사건도 얼마든지 밧세바의 실수로 몰아 붙일 수 있는 거예요. ‘왜 건장한 남자 앞에서 벌거벗고 목욕을 하고 그래’ 그러면 밧세바가 다 뒤집어 쓰게 할 수 있는 겁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이현령 비현령이 바로 세상죄에 적용되는 비리입니다. 그도 저도 아니면 죽을 죄를 지었다고 사과하고 거기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해주거나 아니면 자기가 응분의 죄 값을 치르면 됩니다. 그러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죄는 해결이 되요. 불가능 할 거 없어요. 그게 세상 죄들이지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본질적 죄’라는 게 있어서 그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피조물이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모든 생각과 행동을 다 죄라고 단정 짓는 겁니다.

죄의 뿌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죄들을 직시하게 하셔서 그 죄의 본질을 보게 하시는 겁니다.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하나님 백성들은 죄들, 즉, 그 죄의 증상들, 죄의 세목들을 직시 하면서 근본적인 죄의 실체를 알게 되는 거고 바로 그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면서 ‘하나님 살려 주세요’ ‘세상 죄들은 제가 어떻게 해결을 해 보겠는데’ 이 죄들이 나오게 된 근본적인 그 죄는 제가 어떻게 해결 할 수 없는 것이니까 하나님 도와 주세요.’하는 고백이심령의 가난입니다.

죄들을 회개하고 반성하는 게 아니라 근본적인 이 죄 앞에서의 인간의 불가능함을 완전히 인정하고 항복하는 것을 심령의 가난 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겸손이나 겸양 정도가 아닌 것은 그건 타 종교인들도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다윗이 밧세바와 우리아 에게는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고 있다는 그런 말이 아니지요.

그건 기본이에요. 다윗은 그러한 죄들 보다 더 무서운 죄가 무엇인지를 보았고 자신이 그 죄의 생산 공장이요, 자판기요, 죄라는 원소로 지어진 추악한 존재요, 자신의 재질 자체가 죄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그러한 죄라는 대상 앞에서의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모태에서부터 죄인입니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 밧세바와의 이 죄가 아니였으면, 나는 굉장히 괜찮은 사람인줄 알고 살뻔했네요, 하나님! 그런데 이 죄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에게 교훈하시는 것을 보니 내가 모태부터 죄인이었고, 나는 그냥 죄 덩어리이며 죄의 나무네요.하고 고백하는 것이 심령의 가난 이라고 하는 거예요.

다윗이 뜬금없이 주께서 원하시는 게 진실이라 이야기해요.

“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여기서 진실함이라 표현된 히브리어 에메트(אמת/H571)는 truth face 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범죄한 다윗에게 요구하는 게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진심 어린 고백과 그 고백에 근거한 믿음이라는 거예요.

다윗에게 ‘네가 저질렀으니까 네가 해결해’ 이게 아니에요. ‘너 100대만 맞아’, ‘팔 한 짝 내놓아’ 이런 게 아니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거지요. 그게 성도에게 요구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밑에 유월절 어린양이 등장하는 거예요.

“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시편 51: 7-8>

자신의 죄를 정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우슬초 밖에 없대요. 이 우슬초는 출애굽 유월절에 나와 있습니다.

“22.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출애굽기 12: 22-23>

우슬초는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물건이에요.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해달라는 말은 예수님의 피로 나를 정결케 해달라는 말과 같은 말이지요. 우슬초는 출애굽 이후에도 부정한 것을 정결케 하는데 사용되던 솔 같은 거고, 다윗은 그 우슬초를 이야기하는 거고 성경의 독자인 우리는 그 우슬초를 어린양 예수까지 연결시킬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주께서 꺾으신 뼈로 자기를 즐겁게 해달라고 합니다. 거기서 꺾으신 뼈는 우리 대신 꺾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물론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우리가 꺾여야 할 자리에서 죽으심으로 그걸 꺾였다고 하는 거고, 성경의 예언을 응하게 하기 위해 다리뼈가 안 꺾인 거지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죄들을 직시하게 되어서 처절한 죄책감과 자괴감에 부르짖는 성도의 꺾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꺾어 버리는 거예요. 죄들을 통하여 죄가 뭔지 알으라고, 그리고 내 앞으로 돌아와 항복하라고, 심령이 가난해 지라고, 밀어 넣으신 것입니다. 그런 통한의 자백이 오히려 성도를 즐겁게 만드는 구원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그런 것을 암시하는 거죠.

구원의 길에 반드시 성도의 육적 자아의 꺾임이 수반된다는 거지요. 마치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와 그 범죄의 폭로, 그로 인한 다윗의 고통과 자괴, 그 모든 것들을 다윗의 구원에 사용하십니다.

역사는 종말을 품고 창조가 되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게르할더스 보스가 Eschatology Precedes Soteriology 그랬죠? 종말이 구원을 앞선다. 그건 게르할더스 보스가 한 얘기가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이사야서로 가보세요.

<이사야 46: 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처음부터가 레싯트 에요. 레싯트가 뭐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에서 태초에 레싯트가 종말 END를 품고 나오는 거지요. 종말, 마지막에 이미 완료된 묵시가 있어요. 그런데 그래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 하늘들과 땅을 창조했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2절부터 보면 하늘이 어디로 숨어 버리고 땅의 일만 나오죠? 그건 하늘은 이미 묵시에서 완성이 되어 있고 그것이 이 땅에 지금 그림으로 이제 펼쳐진다는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보이지 않는 것, 묵시가 옛적부터 이미 알려졌다는 거예요. 그 말은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간의 창세전 언약에 의해서 이미 묵시 속의 하늘이 완료가 되어 있다는 거고, 그 완료된 묵시를 세상에 펼쳐서 왜 인간은 그 완료함에 조금도 기여가 안 되는가를 보이시는 거란 말이지요.

우리는 이 역사를 살면서, “나는 왜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존재해야 하고, 하나님으로만 행복해야 하는가”를 배우는 거예요. 그걸 심령의 가난이라고 그래요.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구나를 배우는것에 더해서 우리의 죄와 실수가 사용되며, 추악함이나 모자람도 은혜의 이해에 기여를 하게 된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다윗의 범죄를 막아서 하나님 백성다움에 흠이 가지 않도록 지켜 주신게 아니라 다윗의 범죄를 허락하심으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와 긍휼을 구하도록 만드신 거예요.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죄들을 안 짓게 만들기 위해 역사 속에 보낸 게 아니라, 야 열심히 이를 악물고 허벅지를 찔러 가며 노력하여 너네들이 저지르는 죄의 회수를 좀 줄여가지고 와라, 이게 아니라 우리는 그 죄의 뿌리인 그 죄 안에서 낳고 자라고 거기서 죽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 없으면 큰일 난다 이거 배우고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부르짖으며 오라고, 이 땅에 보낸 거란 말입니다.

마치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의 재산분할 요구를 들어준 후에 불 보듯 뻔한 탕자의 말로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본 것과 같은 거예요(흔히, 초신자일 때 우리가 병주시고 약 주시는 하나님으로 오해하게 하는). 아버지는 탕자의 요구를 거절해서 탕자의 범죄를 막을 수도 있었지요. 하나님 아버지는 그러한 죄들에 산술적 의미를 두지 않으시는 분이에요. 아버지가 궁극적으로 고쳐내시고자 하는 건 탕자의 아버지가 행한 대접이었단 말입니다.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살아야 하는 자신의 현실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게 아버지의 진짜 목적이었던 거지요.

탕자의 불효나 음탕한 행위나 시치스러움 등의 죄들을 막는 게 아버지의 근본적인 목적이 아니란 말이에요. 혹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통전적 신앙이라해서 마치 기독교의 핵심이 성도의 성화인 것처럼 주장을 하는데, 만일 성화가 기독교의 핵심이라면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막을 수 있었음에도 방관한 직무유기를 한 셈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는 성화를 이루어서 통전적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라고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실수나 범죄를 통해서라도 너의 처음 자리를 확실하게 확인하여 아버지만을 의존하는 자가 되어 다시는 선악과를 안 먹는 자가 돼서 오라고 역사 속에 보낸 거란 말입니다. 그게 기독교입니다. 많은 이들이 다윗이 그러한 범죄에 직면했을 때 이를 악물고 이겨냈어야 했다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야 하나님 백성다움이 지켜지는 거 아니냐라는 거지요.

“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 16-17>

다윗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따로 있다고 해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 깨어진 마음, 가난한 마음, 빈핍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라 해요.

여기서 ‘상하고(솨바르שׂברH7665) 통회한다(다카ךכהH1794)’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솨바르, 다카는 파열되고 부수어져 비어진 상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심령’이라고 번역된 ‘레브(לב/H3820)’라는 단어도 의지, 지성, 정서를 모두 포함한 총체적 자아를 가리키는 거예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은 자아가 깨지고 부수어져서 생성된 빈핍하고 가난한 심령을 말하는 거지요.

따라서 가난한 심령은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만들어 내시는 심령을 말하는 거지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죽음을 전제로 만나야 한다 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게 제사에요. 부정한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뵙게 되면 반드시 죽게 되는데 그러한 인간의 죽음 대신에 점 없고 흠 없는 제물이 죽고 부정한 자가 하나님을 알현 하는 것이 제사가 담고 있는 의미입니다.

엄밀한 의미로 제사란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존재의 죽음을 인정하고 긍휼을 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게 제사지요. 제사를 올바로 드리는 자는 내가 하는 것이지만 내가 하는 게 아니여야 되는 거죠. 자기 존재의 무력함을 시인하며, 자기 존재를 부인하는 고백이 제사의 참 의미를 아는 자의 자세 인 거지요. 자신의 죽음을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게 제사의 진의란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제사라는 행위가 자신들의 죄를 없애 준다고 믿었기에 죄를 없애기 위해 반성도 하고, 노력도 허벅지도 찌르고, 자해하며 내가 이런 자니 날 용서해 달라고 기특한 행위들을 열심히 한 거지요. 제사라는 행위 안에는 도덕과 윤리와 율법을 지켜 자신의 자존심을 챙기고 자신의 더러움을 상쇄하려는 인간들의 거룩한 노력도 포함되는 것으로 그것도 제사입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하는 마음 또한 행위에 해당됩니다. 여전히 자기의 판단과 행위에 가치를 두는 거지요. 내가 하고, 내가 안할 수 있다는 이 사고 자체가 행위와 제사라는 거지요.

무지한 신도들이 ‘그러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야?’ 그분들은 행위가 뭔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그것 자체가 행위니까요.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다는 행위지요. 하나님은 그런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는 거예요. 노력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지요. 성령은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 그러한 노력이 없는 게 이상한 거지요. 그러나 은혜의 이해에 앞선 인간 측에서의 행위는 반드시 자신을 향한 칭찬으로 끝이 나기 때문에 먼저 알아야 할 게 있다는 거지요.

누가복음에 이 산상수훈이 나오는데 마지막 구절이 인상적입니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6: 20-26>

여기에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가 나오죠. 선지자는 맨날 울고 가난하고 미움을 받고 전혀 세상으로 하여금 칭찬을 받지 못하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죠?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배부르고 부유하고 온통 세상의 칭찬을 받아지만 주님은 화 있을찐저 지옥이 너희 것이라고 하시지요.

산상수훈의 팔복 마지막에 복 있는 자들과 대조 되고 있는 자들이 부유한 자, 배부른 자에요. 단순히 돈이 많고 밥을 많이 먹는 걸 이야기 하는 게 아니고, 부유함이란 가치 있게 여기는 이 세상 힘과 가치들을 의지하는 행위를 일컫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 돈 많이 벌고 일이 잘 되고 근사한 명예를 얻은 사람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여 사람들에게 존경 받을 만한 인격을 소유한 사람들을 칭찬하지요. 이게 힘의 원리 속에 속한 인간들의 판단의 구조, 선악과입니다.

똑 같은 사람인데 뭐 신앙은 비슷하니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부자고 큰 명예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오히려 선호하는거지요. 뒤에서는 시기 질투 하지만 부러워 하지요. 반대로 가난하고 애통한 삶을 살고 핍박 받는 삶을 살면 사람들은 멸시하고 조롱하고 우습게 여깁니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그렇게 된 거라고 그들의 삶 자체를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그래 놓고 기도 받아야 할 사람들인데 자기들끼리 모여서 기도해 주자고 하지요. 그런데 주님은 핍박 받는 사람들을 복 받은 사람이라하지요.

오해하지 마세요. 착하고 겸손하게 살아서 세상에서 칭찬 받는 그런 성화를 이루는 게 기독교인의 목적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설날 세배를 하러 갔는데 할아버지가 새해 첫 날 덕담을 해주는데 복 받아라고 해주는 게 덕담이지요. 너는 한 해 동안 애통하고 가난하며 핍박을 받거라면 여러분은 할아버지께 뭐라 그러겠어요?

성경은 그걸 복이라 하는데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그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지요. 그런데 성경은 그걸 복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애통하고 핍박받는 자리로 우리를 가난한 심령의 자리로 밀고 내려 가시는 거예요. 내가 이러고도 예수님 믿는 놈 맞나하고 고민하지만 실은 심령이 가난하게 되어져 가는 겁니다.

내가 사유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도 성도됨을 챙길 수 있는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계속 배우는 거지요. 그 가난한 마음이라는 게 어떠한 마음을 가리키는 것인지 시편 40편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6.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시편 51편에서는 이 말 다음에 뭐가 나왔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 그랬지요. 여기에는 뭐가 나오는지 보세요.)

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시편 40: 6-7>

상한 심령의 자리에 두루마리에 기록된 어떤 이가 나와서 “내가 왔다”고 합니다. 상한 심령이 뭔지는 히브리서 10장 4절을 보면히브리서 기자가 아주 명쾌하게 풀어 줍니다.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지금 상한 심령의 자리에 뭐가 들어가는지 추적해 보란 말이에요. 똑같이 이어지고 있어요. 그 내용이 시51편에서 시40편으로 또 히브리서 10장으로)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율법, 구약) 둘째 것을(신약, 새성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 4-10>

준비된 한 몸,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한 몸, 그게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상한 심령은 ‘예수 그리스도’란 입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시편 51: 14>

다윗 자신의 의가 아닌 하나님 의를 의지하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상한 심령’은 내가 드리는 행위의 제사의 가치 없음을 인정하고 참 제사인 예수 십자가 제사를 붙드는 거지요.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의 우슬초와 하나님의 어린 양만을 의지하는 가난한 마음을 갖게 된 동기는 자기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죄를 없애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죄들을 사용하여 진짜 죄가 뭔지를 가르치시는 거란 말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4: 2-8>

다윗이 그 뒤로 죄를 않졌나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솔로몬도 마지막까지 굉장히 우스운 삶을 살았어요. 하나님은 다윗과 솔로몬을 세상 관점에서 훌륭한 자로 바꾸어 내는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셨거란 말입니다. 그 죄를 하나님 주님이 “그거 죄 아니야”라고 인정하실 때 면목 없이 그 은혜를 붙드는 것이 하나님이 다윗에게 요구하신 것이지요.

6절에서 “일한 것이 없다”는 “코르스에르곤”이 행위와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행위와 상관없이 의가 주어진다는 의미지요. 바울은 6절에서 그 사람을 가리켜 행복한 사람, 복 있는 자라고 부릅니다. 복 있는 자는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선물 받은 자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난한 상한 심령입니다.

7절과 8절에 다시 다윗의 시편이 인용되는데 이는 시편 32편에서 인용된 겁니다.

“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2: 1>

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6.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시편 32: 3-6>

지금 여기서 다윗이 한 게 자백하고 토설한 것 밖에 없고, 고치고 했다 라는 말이 없지요. 자백하고 토설했더니 자신감이 생겨서 찬송이 터져 나와요.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니까 어떤 홍수가 와도 나를 범람치 못한다는 뜻이에요. 그게 복음을 아 자들의 당당함이에요.

다윗이 자신의 죄를 감추고 토설치 아니했을 때에는 종일 신음을 하고 뼈가 쇄하도록 고통스러워 했는데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를 폭로시키시고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의 실체를 자백하게 하신 후에 다윗은 즉시 평안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 시편이 밧세바와의 범죄를 일으킨 후에 쓴 건데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런 시를 썼겠어요. 그런데도 회개를 안했다니까요. 인간은 회개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아가셔서 들어 내버리시고 토설을 하게 했더니 그때 찬송이 터지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죄를 들어 쓰십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할 때도 경수가 끝났는지 확인했는데 그건 경황이 없는 가운데서도 율법을 지키기 위해 부정한 상태가 아닌지를 점검했다는 뜻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죄 가운데서도 나의 가치와 영광은 끝까지 챙기려는 거지요. 죄를 지으면서도 금식하며 기도도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낱낱이 그의 실체를 폭로시키시자 하나님 우슬초로 나를 정결해 주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꺾으신 뼈로 나를 즐겁게 해주시는 외에는 방법이 없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거지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하나님의 언약만 의지합니다라는 그 가난한 마음이 어떻게 우리 구원의 증거가 되는지 살펴 봅니다.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 8: 9>

원래 가난한 마음, 상한 심령은 우리 것이였지요? 그것을 예수님이 가져가셨다는데, 죄인 중에 괴수라는 걸 인정하는 가난한 마음 그 자체의 가치로 용서 받는 게 아니지요. 죄인 중에 괴수는 죽어야 마땅한데 이 고백이 살려 주는 게 아니라 고백을 한 자의 가난함만 가져가는 겁니다. 그리고그 빈 자리에 하나님은 예수의 부유를 부으시는 거란 말입니다. 이게 구원의 메카니즘입니다.

예수님이 부유하신 자로써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의 가난함을 가져가시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진짜로 가난한 마음, 상한 심령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올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닌데,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한탄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에요. 인성, 신성 따질 필요 없이(성경 어디에 인성, 신성 이란 말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입니다.

예수님 능력을 따질 필요 없이 아버지의 뜻이 그 자리에서 죽는 거였기 때문에 무력한 자가 되어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신 겁니다. 그러면서 영원동안 헤어져 본 적 없는 아버지와 떨어진 것이었지요. 예수의 심령이 산산이 깨져 버리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하면, 이것이 상한 심령입니다.

제사의 제물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예수의 모형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제사를 원치 않고 상한 심령을 원한다고 한 것은 제사의 제물로 모형 되었던 예수를 원한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 예수의 상한 심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아났다는 것을 내가 믿고,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그 은혜를 찬송 하는 그것이 우리의 상한 심령인 셈입니다. 예수님의 온전한 자기 부인이 우리의 자기 부인을 끌어내는 형국으로 비유됩니다.

그런데 마음을 가난하게 해야 된다. 욕심을 버려야 된다고들 이야기하는데, 예수 안 믿고도 욕심 없이 사는 사람 많아요. 지리산에 가니까 왠 거지떼들이 거기서 욕심 없이 잘 살고 있더구만요. 욕심이 없는 게 아니라 게으름으로인한 자포자기한 거지요. 심령이 가난한 건, 그런 종류의 가난이 아니지요.

다윗이 이야기한 상한 심령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상한 심령이라기보다 십자기 위에서 갈갈히 찢긴 예수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래서 제사와 상한 심령이 대조가 되어서 나오는 겁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십자가만을 진짜 제사로 받으시는 분이에요.

요한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게 말씀을 하세요.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서머나 교회에게 주님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 하시는데 서머나 교회와 대조하여 책망하는게 유대인이지요. 그리고는 그걸 사단의 회라고 이야기를 하세요. 유대인들은 율법 열심히 지키고 제사 열심히 지내고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 나라 갈 수 있다 라고 생각한 부유한 자들이지요. 그걸 예수님이 사단의 회라고 합니다. 초대 교회 때 서머나 교회를 비롯해서 초대 교회 때 가장 골치 아팠던 게 그 영지주의와 유대주의였어요.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이미 생각하는데 생뚱맞게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죽으면 사흘 만에 부활한다고 했는데 실제로 부활해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 버렸어요. 그런데 아무리 핍박을 해도 이들이 수그러들지 않으니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들을 파송해서 은혜 + 행위 = 구원의 공식을 만들어 심는 거지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속지마 다른 복음이야 그거 거짓 선지자야 그걸 갈라디안식 신앙이라고 했지요. 복음 비슷하게 의장한 가짜입니다.

인간들의 행위와 세상적 가치를 심었던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 하도다”  <요한계시록 3: 17>

돈도 많고 교인도 많고 선한 행위도 풍부하게 넘치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너희는 가난한 자들이다 그래요. 내가 가난한 자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진짜 가난한 자들이라고 이야기 하는 거지요.

나는 착하게 율법 잘 지키고 있으니까 괜챦아하는 이게 부요한 거지요. 우리 모두가 죄인 중의 괴수여야 되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4장에서 구원의 천국의 현실을 이렇게 모형으로 한 번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13.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누가복음 14: 12-14>

구원이라는 것이 아무 것도 갚을 것 없는 너희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거지요. 너희들은 갚을 수 없는 가난한 자들, 병신들이요, 저는 자요, 소경이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라고 그랬어요. 창조 목적이지요. 모든 존재하는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지요. ‘창조의 목적’ 그래서 갚을 게 없는 자들이 구원을 받아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죠.

그렇게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맡긴 자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자연적인 지향성을 성화라고 하는 겁니다. 성화는 결코, 노력해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힘과 노력과 의지를 근거로 성화를 해내겠다고 하는 자들은 반드시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비판 하게 되어 있습니다.

“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교회 안에 있는 놈)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10.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 <요한삼서 1: 9-10>

교회 안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자, 내가 너보다 성화 더 되었지?, 내가 너보다 복을 더 많이 받았지? 이런 자들, 이런 자들은 반드시 추악한 일들을 저지른단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자들이 바로 자신의 힘으로 성화를 이뤄보겠다고 너스레를 떠는 자들이에요. 그러한 자들은 다른 이들이 자기보다 더 나은 평가를 얻는 걸 절대 용납하지 못해요. 자기 사람을 남에게 빼앗기는 것도 절대 용납하지 못해요. 그러한 자들은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적인 죄들은 덜 질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진짜 죄는 그 정의조차 내리고 있지 못하는 자들이 분명하지요.

하나님은 세상 죄를 통해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 내시는 분임을 잊지 마세요. 우리가 함부로 비난하고 정죄하는 그들이 지금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근본적 죄를 자각하는 길을 가고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윗이 저지른 행사를 우리가 옆에서 보고 있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드디어 타락하여 저건 죽었구나라고 평가했을 것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게 다윗의 살 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를 보고 함부로 평가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한 증거일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이 세상에서 성화를 완전히 이룬다구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죄를 지적하고 정죄하면서 우리는 저러지 말아야지하고 자신들의 의지를 내세우며 주먹을 불끈 쥐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진짜 죄인들인지 모르는 것이지요.

죄를 구별하셔야 되요. 자신의 힘으로 죄들을 해결하겠다고 죄 짓지 마시고, 오히려 죄들을 통해 죄를 직시하고 그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의를 붙드는 진짜 복 받은 자의 삶을 잘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로 얼마만큼 살아야 하나님 마음에 들겠습니까? 안 된다고 예수를 이 땅에 보내서 죽이시기까지 하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기를쓰고 예수와 버금가는 삶을 살면서 예수를 닮겠다고 합니다.

죽으라고 예수를 보내셨는데 오히려 세상은 예수를 닮겠다고 나섭니까? 바벨탑을 세우고자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시대를 불쌍히 여기시고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당신 백성들의 눈과 귀를 열어 그들의 심비에 새겨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 (산상수훈, 신약의 산이 구약의 산을 부수다!)

동상이몽, 내 어깨위에 무거운 짐 위로 싸늘한 햇살이 뒤엉켜 있을 때 너무나도 간절히 주님의 이름을 불렀죠 나를 보고 있냐고? 너무 힘이 들어 눈 감을 힘조차 없는 나인데, 왜 보고만 계시는지?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런 고통을 막아줘야죠? 내 뺨 위로 눈물이 흐르고 하늘에는 여전한 침묵이 날 비웃듯 세상은 너무나 편안하게 제길을 가는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냐고 원망해봐도 대답은 없고 삶의 무게에 숨이 멎어갈 때 고통의 의미를 알게 됐어요.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기에 내 눈물 흐를 때 당신 눈물 흘리시며 이 고난의 시간이 지나면 소망의 열매로 내게 주시죠.

<산상수훈 01>

“신약의 산이 구약의 산을 부수다.”

<마태복음 5: 1-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여러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이 이같이 핍박 하였느니라”

산상수훈 내용입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것이 꼭 정답일 수는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산상수훈을 위해서 논문들과 강해서들과 주석들을 샅샅이 읽어봤는데 산상수훈의 보편적 이해의 흐름을 정리를 할 수 있었어요.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이 산상수훈을 구원받은 자들의 행동강령에 무게를 두어서 결론을 내고 있었습니다.

특히 청교도 신앙의 전승자라고 자처하는 존 오웬이나 리처드 백스터 같은 사람들이 특히 그런 경향을 아주 짙게 담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지요. 그러나 헤르만 뤼데보스 비롯해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 이르기까지 산상수훈을 구약과 연결을 해서 명쾌하게 예수로 연결해 내는데 있어서는 미흡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보편적 산상수훈의 이해인데, 성경 신학적 관점에서 이 산상수훈을 강해해 보고자합니다.

이 산상수훈은 타 종교인들까지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할 정도로 아주 보편적이며 인기가 있는 보편적 윤리 강령이죠. 물론 그들의 평가이고 이를 윤리강령이라 하죠. 서두에 팔복강화의 부분에 마치 후렴구처럼 따라나오는 복이라는 단어가 아주 매력적이죠.

복, 복, 복 우리가 너무 좋아하는 복, 그래서 타 종교인들까지도 광분하면서 이 산상수훈을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해서 복 받고자 실천에 옮기려 하는 거예요. 마하트마 간디가 죽는 날까지 제일 열심히 읽었던 책이 바로 산상수훈이었답니다. 불교의 법화경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거의 흡사한 내용들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산상수훈을 도덕과 윤리 혹은 그리스도인으로써 지켜야할 행동강령 정도로 이해를 한다면 성경과 타 종교인들의 경전과 다른게 없습니다. 과연 산상수훈이라는 것과 타 종교인들이 갖고 있는 경전이 목적하는 바가 같은걸까요? 그러면 뭐 하러 꼭 성경을 공부합니까? 불경을 공부해야지요.

산상수훈이 인간들의 자존심과 가치와 유익을 챙겨주는 윤리강령의 나열이나 그런 윤리강령을 잘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선언에 불과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들의 기대와 반대로 이 산상수훈은 오히려 오히려 그러한 인간들의 자기 의 쌓기를 부수는 겁니다.

구약의 의가 신약의 새 언약에 의해서 박살이 나는 곳이 바로 이 산상수훈의 현장입니다. 완전히 반대 이야기지요. 그래서 제목을 산상수훈이 강화되는 신약의 산이 구약의 산을 부수다라고 붙인 거예요.

신약의 산은 바로 이 산상수훈이 뿌려지는 산을 말하는 거고, 구약의 산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율법의 산, 시내산을 가리키는 겁니다. 성경은 전체가 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새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구약의 율법을 부수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늘의 의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내시는지를 보여 주는 게 성경입니다. 이 산상수훈이 5장이죠? 4장 말미에 예수님 공생애 시작 부분이 나오는 그곳에 붙어 있는 거지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데 거기에 어떤 오해가 발생하고 예수님이 거기에 대한 설명으로 붙여 주는 게 산상수훈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병자들이 치유되고 귀신들린 자들이 놓임을 받는 기적이 일어나는 곳으로 화려하게 시작이 됩니다.

그야말로 화려했지만 단순한 기적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대한 선포였죠? 선악과 따 먹은 아담 군상들이 뱉어놓은 역사의 실체, 병들고 썩어지고 귀신들리고 왜곡된 상태, 즉 사망의 상태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메시아로 보내셔서 그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병들고 썩고 귀신들리고 왜곡된 것들을 새롭게 완성해 내시겠다는 완벽한 설계도를 작성하셨어요. 그게 바로 창세전 언약이죠? 그 설계도에 의해서 옛 성전 즉, 구약이 무너지고 은혜를 재료로 한 새로운 성전이 지어지는 것이 구원인거고, 하나님 나라 건설인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당신의 공생애를 사망의 증상들을 몰아내는 것으로 시작하신 겁니다. “내가 이 일을 하러 왔다”를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라는 것을 모형으로 보여주신 거지요. 예수님이 성취하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4: 23-25>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 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쫓아 왔는데 다 물리치고 제자 12명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사실은 하나님 나라가 이런 거다라고 다시 설명하신다 말입니다. 그게 산상수훈이지요. 예수의 모든 기적 행함이 모두 천국 복음에 관한 일이란 말예요. 그러니까 ‘천국은 이런 것이다’ 를 보여 주기 위해 행한 기적이 그건데, 뭔가 거기에 모인 허다한 무리들이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거죠.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구름처럼 몰려들었어요. 천국 복음을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몰려든 거라면 당연히 예수님께서 기뻐하셔야 될텐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만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천국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산상수훈입니다.

5장부터 7장 마지막까지를 산상수훈이라고 해요. 8장 1절에 산에서 내려온 그 이후부터는 산상수훈이 아닙니다.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님과 그 분이 가져오신 그 천국과 하나님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말인 거예요. 여러분도 지금 분명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는데 하나님 나라가 뭔지를 모르니까, 내가 지금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는 건가 아닌가 아리송하신거예요.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를 사는 거냐고 물어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침노해 들어와서 그냥 아예 그자를 장악해 버리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겁니다. ​

예수님께서 천국에 하나님 나라에 기초와 근간을 다시 설명해 주시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산상수훈의 맨 마지막이 모래 위에 지은 집, 반석 위에 지은 집의 비유, 그 기초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산상수훈이지요.

그 비유를 끝으로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세요. 구약을 기초로 한 집은 창수가 나고 바람이 나면 완전히 무너지는 거니까, 하나님 나라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12제자에게만 이를 가르치신건데, 12제자는 요한계시록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니 교회에게만 가르쳐 주신거지요.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관이나 천국관은 구약적 패러다임을 신봉했는데, 구약적 패러다임 속의 천국은 자신들의 모든 문제가 해결이되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는 신앙인인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거기에 자기들의 율법적 행위가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게 구약의 천국관이고 구원관입니다. 구원도 인간들이 그려놓은 그림대로 와야 하고, 천국도 인간들의 설계도대로 만들어져야 하는게 민속 메시아 사상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떤 분이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일으키고 약한 자들의 무릎을 일으켜 세우시는 기적 같은 일을 행하시는 데 사람들은 진의를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육적 필요를 채워 주는 엄청난 힘을 소유한 예수님에게 엉뚱한 천국을 기대하며 몰려들었던 거예요.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니까 도망가시는 거지요.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익이 될 만한 것을 힘으로 갖고 있는 사람을 쫓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그릇된 천국관과 메시아관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산상수훈입니다.

따라서 산상수훈은 도덕적 윤리적 처세에 관한 이야기나 복 받는 비결이 아닌 거지요. 인간들의 행위와 자격에 상관없이 이미 완료가 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치고 들어오는지에 관한 설명이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은 모형과 예표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 줬던 그 구약의 산, 시내 산을 부수는 신약의 산입니다. 마태복음의 구조와 흐름을 잘 보시면 이 산상수훈이 위치하는 자리가 구약의 어떤 산과 같은 자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어요.

예수님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 나서, 헤롯의 칼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을 하세요. 성경은 그 사건이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라는 구약의 예언 성취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장에 그 사건은 예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의 삶을 그대로 사실 것임을 암시하는 사건임과 동시에 율법주의와 유대주의로 자신들의 힘과 가치를 숭앙하는 이스라엘 자체를 힘의 세상인 애굽으로 선언해 버리는 거지요.

예수님이 이스라엘에서 애굽으로 가셨는데 성경은 하나님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고 하십니다. 유대주의의 이스라엘이 애굽이 되어 버린거예요. 하나님이 그걸 부수는 거지요.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베들레헴 지역의 두 살 미만의 남자 아이들이 모두 도륙을 당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여기서부터 산상수훈까지 갈 거니까 산상수훈이 어떤 부분의 모형인지를 그 흐름을 보시란 말예요.

<마태복음 2: 15-18>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 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여러분 이상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이 분명 요셉에게 그 자리를 피하라고 전언하셨죠?

어린아이들을 다 죽여 버리고 예수님만 들어서 애굽으로 보내신 것은 성경의 독자들에게 뭔가를 교훈하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드신 거지요. 그래서 그 하늘에 뜬 별이 동방박사들을 일부러 헤롯으로 데리고 간 것은 애들을 죽이라는 암시라 하겠지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라는 호세아의 예언이 인용된 곳에 ‘라헬의 통곡’ 이라는 예레미아의 예언이 이어지고 있는 곳을 주의해 보셔야 되요. 지금 성경은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그 율법주의 자체를 세상 힘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애굽으로 규정을 해 버리시고 예수님을 거기서 빼내는 거예요.

예수님이 첫 번째 출애급을 하고 그 뒤를 따라 하나님 백성들이 엑소더스를 하는 거지요. 그것은 이스라엘의 유대주의, 율법주의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거기 와서 죽으시는 거예요. 애굽은 바로 교회 안에 그러한 율법주의, 유대주의의 모형으로 우리 안에 있는 ‘옛 자아’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율법주의 자체를 힘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애굽으로 규정해 버리고 그곳에 사는 모든 자들은 다 죽어야 할 자들임을 어린아이들의 죽음으로 주지시키는 거예요. 애굽이니까.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은 어떤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자의에 의해서 내어 놓기도 전에 죽어야 할 자로 분류된거지요. 이걸 원죄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은혜가 개입하지 않으면 다 죽어야 할 존재예요. 죽은 흙이니까. 나면서부터 죽어야 할 자로 분류가 되는 자들이 자라면서는 오죽하겠어요. 그러니까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다 죽었다는 건 거기에 사는 모든 자들은 다 죽어야 할 자들이라는 선언으로 봐야하겠습니다.

마태는 그걸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예레미아의 예언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대의 멸망과 관계있는 예언이고 ‘라마’는 남유대가 바벨론 포로로 끌려 갈 때 집결된 곳으로 베냐민 지파의 성읍입니다.

여호수아 18장에 보면 라마는 라헬의 무덤이 있는 샐사 부근이고, 예라미아 선지자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북이스라엘은 이미 망했고, 마치 라헬이 그 무덤 속에서 자기 자식들이 끌려가는 걸 보고 통곡하는 것으로 묘사 한 거지요.

라헬의 두 아들이 요셉과 베냐민, 요셉의 큰 아들은 망한 북이스라엘의 대표 지파인 애브라힘이지요. 남유대는 베냐민, 라마가 또 베냐민의 땅이고, 요셉과 베냐민, 두 아들을 다 잃은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라헬을 이스라엘의 어미라고 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다 멸망했다는 것은 하나님 백성으로 택해진 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은 다 죽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다 죽었는데도 라헬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것은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죽은 자식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이외 다른 것은 절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 하면서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예수가 바로 그 죽은 아들을 살리러 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겁니다.

한 아기가 와서 죽음에 던져져야할 하나님의 아이들을 선택하여 살려 내는 것이고, 그걸 구원이라고 하지요. 그렇게 예수는 죽어야 할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것이지, 이 죄악의 세상에서 그들의 일상을 풍요롭게 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산상수훈을 구약의 시내산이 어떻게 신약에서 회복되고 성취되는가의 측면에서 보아야 되는 거지요. 신약에서 구약의 시내산을 다시 그려내고 있는 산이 두 군데 나오는데, 그 하나가 이 산상수훈의 산이고, 나머지 하나가 변화산의 그 산입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데, 이 산상수훈은 새로운 하늘의 법이 공포가 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있는 거고, 변화산은 그러한 새로운 법이 통치하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모형으로 그려지고 있음과 동시에 산상수훈의 산에는 12지파를 상징하는 12제자가 올라가 있고, 변화산에는 두 증인, 모세와 엘리아로 모형 되었던 교회로 그려지고 있는거지요. 계시록에서 그 모세와 엘리아, 교회가 예수님과 또 함께 있는 거지요.

그러나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 다른 거지, 두 증인과 12사도는 똑같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엘리야와 모세로 대표되는 두 증인 즉, 교회가 그 변화산 위에 나타나는데, 모세는 시내산, 엘리야는 호렙산, 두 산은 같은 산으로 변화산 위, 바로 그 시내산에 올라 갔던 두 사람이 올라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변화산과 이 산상수훈의 그 산은 구약의 시내산의 신약적 성취를 보여주는 산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9: 30-31>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새”

여기서 이 별세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엑소더스에요. 엑소더스는 출애굽기의 제목이죠. 예수님의 엑소더스가 하나님 나라를 완성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거예요. 시내산에 올라갔던 그 세 분이 그 예수님의 엑소더스(별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산상수훈이 전해진 그 산이나 변화산의 그 산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부수어진 구약의 율법과 그렇게 해서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산 아래에서 제자들의 믿음 없음이 드러나는 금송아지 사건 같은 사건이 일어나는 거지요. 구약의 시내산이 갖는 메시지를 잘 정리 해야 신약의 시내산인 이 산상수훈의 내용을 올바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지 50일째 되는 날, 시내산에 하나님이 강림하시고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십니다.

<출애굽기 19: 5-12>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이게 구약의 율법이에요. 잘 지키면 복 준다. 이거에요. 이게 시내산입니다. 구약의 시내산)

7.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8.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함이니라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고하였으므로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 들로 옷을 빨고

11.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엄밀히 말해서, 구약의 옛 성전은 그 자체 안에 자체 부정과 충돌을 내포하고 있는 거지요. 율법의 표상인 성전 안 지성소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인간들의 죄가 십계명 돌판으로 들어가 있고 그것이 일 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염소의 피로 덮힘으로 말미암아 용서가 되는 은혜의 현실이 그 안에 숨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성전을 측정하는데 성전 안에서 정사각형은 지성소 밖에 없는 것은 성전에서 구약의 성전에서 오직 지성소를 보여주고자하는 의도를 발견합니다. 지성소란 신약의 새 언약을 나타냅니다. 예수의 피에 의해 인간들의 죄가 거저 덮히는 은혜가 바로 이 율법의 성전을 부수는 것이다는 의미를 구약의 성전이 담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실제로 신약에 와서 그 성전이 부숴지고, 이스라엘은 그 두 번째 십계명 돌판을 볼 때마다 나는 죽어야 할 사람인데 모세의 중보로 살아난 자라는 자기 부인의 고백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성경의 법을 대하여, 하라, 하지말라의 명령을 지켜야지하는 단말마적인 생각은 과감히 버리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이걸 먼저 지켜야 되겠다 라는 그 의지를 발동하기 보다는 성령이 그걸 지켜야 되겠다하는 지향성을 가지고, 나는 벌써 율법 때문에 죽었어야 할 자인데 예수 때문에 다시 산 자라는 은혜의 현실을 붙들어야 하는 겁니다. 성전의 의미를 너무 빨리 잊어버리고 또 다시 출애굽기 19장의 그 허탈한 맹세를 하고 있었던 게 구약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다 지키게요. 다 지키게요. 그러다가 다 죽을 뻔 했잖아요.

예나 지금이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신봉하고 지키면서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에덴의 아담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지요. 왜 훌륭한 신앙인이 언행일치가 안돼? 하면서 우기는 게 바리새인들입니다. 자신들은 천하에 내놓을 수 있는 건강하고 건전한 신앙인이라고 착각하는 거지요.

이 역사는 아담들의 ‘하나님처럼의 행위’, 즉 구약이 부인되고 깨져야하는 곳입니다. 미가서에 보면요. 한 산이 부수어 지고 다른 산이 새롭게 서는 장면이 나오는 거지요.

<미가서 3:9~12>

“9. 야곱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곧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이 말을 들을지어다

10.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11.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삵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12.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갈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이 있는 곳이에요)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성전, 율법의 모형인 그 성전이 서 있는 곳, 구약의 산, 율법의 산인 시내산은 부수어지고, 새로이 시온과 예루살렘이 등장할 거라고 이야기해요. 다음 장으로 가보세요.

<미가서 4: 1-4>

“1.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옛날에는 그리로 몰려가면 다 죽었지만 민족들이 새로 세워지는 그 산에는 올라간다고 하지요. 예전에 시온산이 무너진 그곳에 선 그 산에는 모여 올라간대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산상수훈에도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12사도가 아무런 제지 없이 예수가 이끄는 산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미가서의 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는 겁니다.

<미가서 4: 1-4>

2.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이스라엘 정도가 아니라 많은 이방이 함께 산에 올라 갑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산과 성전을 같은 것으로 보죠. 동격으로 묘사를 한다구요)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수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지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도를 전하고 있잖아요. 산상수훈에서 이 이야기 하는 거예요. 구약의 율법은 그들을 죽이는 율법이었는데 지금 새로선 그 산에서 나오는 율법이 이들을 지금 살려내고 있는 거죠. 새로운 법입니다)

3.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4.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이 내용은 이사야서 2장 1절에서 4절까지 똑같이 또 기록되고 있습니다. 두 선지자가 똑같이 토시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은 얼마나 중요한지잘 보시면 여호와의 전과 여호와의 산이 다른 산들의 꼭대기에 선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산들이 부정되고 새로운 산이 그들을 점령하는 거지요. 이스라엘도 아닌 많은 이방이 그 산, 새 성전에 올라가는 겁니다.

산상수훈에서는 예수라는 성전이 사흘 만에 내가 다시 지을 거야는 예수님의 성전 됨을 이야기 하는데 이미 부서진 그 율법의 산, 여호와의 말씀의 산, 시내산이 다시 나타나 또 다른 율법과 여호와의 말씀이 전해진다는 거지요. 물론 그 율법과 말씀은 이미 부수어진 구약의 산, 옛 성전에서 전해지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 그게 바로 산상수훈입니다. 구약 때는 근처에만 가도 죽이시던 하나님이 그 말일의 산, 말일의 성전에서는 사람들을 모아서 그들에게 도를 가르치고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다는 거지요.

새로운 산에서 전해지는 새로운 하늘의 법과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산상수훈의 내용인데 구약의 산과 신약의 산 사이에는 예수님 십자가가 서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산상수훈의 현실을 구약의 시내산과 비교해서 묘사합니다.

<히브리서 12: 18-24>

18.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19.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여기가 첫 번째 율법이 전해 졌던 시내산이지요. 히브리서 기자가 교회에게 너희는 그 산에 당도한거 아니라고 합니다)

20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지금 미가서의 그 산이에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미가서에 나온 그 단어들이 그대로 등장하죠)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의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바로 이 산인 거예요. 그런데 그 산을 가리켜서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고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라고 그러지요)”

산상수훈의 산은 예수에 의해 성취된 새 언약의 산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선포되어지는 곳입니다. 시내산, 그 율법의 산은 모세도 못 들어가던 산인데 하나님 은혜가 부어져서 많은 이방까지도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산이 섰단 말이지요. 그게 산상수훈입니다. 그 입구에 예수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산상수훈을 지금도 우리가 지켜야 할 도덕이나 윤리나 행동강령으로 해석을 하면 구약으로 돌아가자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산상수훈은 다른 종교인들까지 쫓기를 원하는 기독교 윤리나 실천 강령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하나님 나라가 이 역사 속에서 성도를 어떻게 구별해 들어내시고 만들어 가는지에 대한 명쾌한 선포인 거지요.

본문 2절을 보면 입을 열어 가라사대 라는 어구가 나오죠. 이거 마태가 일부러 끼어 넣은 거예요. 왜 굳이 이 단어를 썼을까요? 구약에서는 그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 떨어지게 되면 죄인들이 죽었으니 벌벌 떨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의 법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데 제자들은 턱을 괴고 편하게 듣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신약의 산상수훈의 핵심인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은 은혜로 설명됩니다.

지금 이 산상수훈은 예수님에 의해 이미 완료가 된 하나님 나라의 기초와 근간에 대해서 확실하게 설명을 하는데, 그건 너희들의 행위가 아니라은혜로 되어진 것이라 하지요. 이는 구약의 율법을 부수고 새 언약의 성취를 확고하게 세우는 내용입니다. 산상수훈의 맨 앞부분과 맨 뒷부분을 샌드위치 빵처럼 감싸고 있는 단어, 천국입니다.

<마태복음 5: 3>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태복음 7: 21>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니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지요. 천국은 대접 받고자 해서 먼저 남을 대접한 예수에 의해 완료 되어 이미 교회에게 주어진 곳이라는 거지요. 이게 7장 서두에 나옵니다. 너희들이 대접 받으려면 먼저 남을 대접해라. 이거는 불경에도 나오는 얘기에요. 초등학교 도덕책에도 나오는 이야기지요. 예수님이 대접받기 위해 우리를 먼저 대접한 게 십자가인데 어떤 대접을 받기를 원했어요? 예수님, 당신이 우리를 구원 않으면 우리는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그 대접이고,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가 아닌 인간들의 선악 구조로 행하는 자들은 절대 천국어ㆍ 못 들어간다. 이게 산상수훈의 요지입니다.

7장의 결론 부분을 보시면 인간의 선악 구조의 판단에 의해서 열심을 부린 사람들이 지옥 문 앞에 서서 막 항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7: 22-23>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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