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오해와 진실(VI)!
(1) (하나님처럼 행하는 거짓 선지자!)
모든 성경의 이야기, 예수 이야기는 나에게서 감지가 돼고 내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로 만들었다해요. 과거완료입니다. 그 아들이 이 땅에 죄인으로 내려와 그 죄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 하며 삽니다.
2조원이 있으면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행복할 거 같죠? 공허해서 미치겠더래요. 그러니 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고요? 과연, 이 세상에서 주구장창 행복한 사람이 누가 있어요? 하나님 흉내내고자하는 그 죄때문에 힘들어요. 하나님 흉내 내는 그 삶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힘든 삶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게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이며 인생이라니까요.
그래서 아들들을 잠시 죄의 모양으로 정죄하여 내려 보내는 거예요. 경험해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아들의 이야기는 예수 이야기인 동시에 나와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율법, 즉 말씀에 의해 죽고 진리로 살아나는 예수와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아들의 이야기는 죽는 만큼 살아나게 되고 누리고 자유하게 되는 그 죽음은 육체의 죽음으로 완료가 되고. 육체가 죽으면 완료가 되고 완성이 되는 거지요.
육이 완전하게 종료되면서 피조물의 하나님 흉내 내기가 종료되는 거란 말이지요.
그 이야기는 열왕기상 17장의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인데 엘리야가 까마귀로부터 고기와 떡을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먹었던 것으로 막고 다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했을 때, 누가복음에서는 저 까마귀를 보라고 했는데 그 까마귀라는 ‘덮다’, ‘장막을 치다’는, 이런 단어니까 옛 성전을 의미합니다.
옛 성전이 광야로 물어다 주는 그 떡과 고기는 율법이니까 절대 그들을 살려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릿 시냇가에서 먹는 거예요. 먹고, 그릿이 카라트라 그랬습니다. 인간이 선악구조의 두 마음으로 하나님께 뭔가 드리려 할 때 항상 둘로 나누어서 제사와 율법으로 드린단 말이지요. 그걸 바탈이라 그럽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게 카라트(케리투투, 이혼증서) 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법으로 보고 행위로 내놓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겠다고 하면 하나님이 넘어가서 케리투투(이혼) 해버리세요. 하나님과의 이혼증서. 그래서 엘리야가 까마귀로부터 떡과 고기를 받아먹고 그릿 시내가 홀랑 말라버릴 때, 그 카랏트, 그릿 시내를 넘어가버려요. 경계를 확실히 그어버리는 거지요.
유대, 이스라엘, 너희는 까마귀가 주는 떡과 고기를 먹는, 진짜 기근 속에 있는 자들이야. 그런데 그 밖에 풍년이 있단다. 그게 기근의 이야기에 붙어 있는 거잖아요? 내가 가진 건 이 밀가루 한 줌밖에 없는 그런 쓰레기 같은 존재인 것을 아는, 남편이 필요한 어떤 과부에게서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줌까지 홀랑 뺏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다나투스의 죽음이라는 거라니까요. 그랬더니 비로소 그 집에 풍년이 와서 기름이, 진리의 말씀이 떨어지지 않고 양식이 떨어지지 않아요.
백부장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 너희 안에는 이런 믿음 없어라고 이스라엘을 부정하고 카라트, 그릿 시내를 홀랑 넘어가서 나인 성으로 가는 거예요. 거기서 남편이 필요한 과부를 만나는데 그 과부의 아들이 죽었네요? 아들이 죽었다는 단어가 완료 능동태로 스스로 죽었다는 뜻이에요. 아들이 자살했다는 뜻이 아니라 나는 스스로 버릴 권세가 있는 자야라고 한 어떤 아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 스스로 죽은 과부의 아들이 있어요. 그 아들을 뭐라고 부르느냐 하면 과부의 ‘독자’, 모노게네스라 부르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의 그 독생자랑 똑같은 단어라입니다. 아들이 독생자, 모노게네스, 하나님의 진리를 하나로 가진 자인 그 아들이 죽어요. 그 아들은 예수이면서 ‘나’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아들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어떤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예수 자신도 들어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전체를 대표하는 셈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그 아들이라는 단어는 씨라고 했죠? 아들은 생명의 씨인 진리를 가진 모든 자들을 총칭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담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 말씀이라고도 하고 아들이라고도 하는 거예요.
씨를 가진 남자가 여자에게 주면 그 안에 생명이 들어가 그 여자가 씨를 갖게 되고 생명이 잉태되면 그를 아들이라 부르지요. 신부가 아들을 신랑으로 가지게 되면 그 신부가 아들과 연합이 되어서 아들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거예요. 씨를 가진 아들로. 또 다른 아들로 새롭게 재탄생 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진리를 가진 이들은 그 안에 생명의 씨를 가진 이들이 되어서 신부에서 아들이 되어지는 겁니딘. 그래서 여자들이 점점 남성화 되어 가는 거라고 했죠? 그건 진리를 담고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겠지요. 저 마누라가 옛날엔 안 그러더니 저렇게 빡빡하게 변해가는 걸까?
원래 그렇게 되어 있어요. 어린 양과의 혼인잔치는 이미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야 하는 거지요. 여러분은 씨를 마음으로 가져서 아들이 되고 자기 안에 그 생명의 씨, 그 진리의 말씀을 담게 되면 그 진리가 하나님이므로 내가 바로 성전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지할 수도 담을 수도 없어요. 하나님이라고 불러도 안 돼요. 하나에다가 님자 붙인 게 어떻게 그분의 이름입니까? 이름도 부를 수 없는 그분. 그래서 히브리사람들은 ‘아도나이’라 불렀지요. 부를 수도 없는 그분, 그 존재, 아니 존재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오감이 감지가 되어야 존재라 부를 수 있는 것이겠지요.
우리의 수준에 맞는 진리, 말씀으로 전해 준 그것이 내 안에 들어오면 그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고 여겨주시는 거란 말이지요. 우리의 수준에서 담은 그 하나님을 엘로힘이라고 합니다. 그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내가 바로 하나님이 계신 처소, 성전이 되는 겁니다. 히브리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처소를 ‘알레트 베이트’ 해서 ‘아브’ 라고 써놓고 아버지라고 읽는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처소라고 써놓고 글자 파자를 하면 ‘아버지’라고 읽는거지요. 그래서 그 안에 진리를 담고 있는 이들은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진리를 씨로, 생명으로 갖고 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처소가 됩니다. 사도 바울이, 너희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인줄 모르니?라고 하셨지요. 성경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글자로 써놓고 히브리사람들은 아버지라고 읽는다니까요.
이 모든 게 현상계가 다 진리로 읽혀지게 되면, ‘유 호도스’가 참 진리로 읽혀지게 되면 그걸 강건 이라 하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읽혀지면 어떻게 돼요? 이게 푸쉬케가 ‘영혼’이라고 되어 있는데 육신이에요. 푸쉬케 기식하는 푸쉬케. “이 푸쉬케가 역시 유도 좋은 그 진리의 길로 들어서면 그렇게 되는 거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네 육신 영혼이 잘 됨 같이 네 육신 푸쉬케(푸쉬케 자체로는 멸망입니다)가 영혼의 푸쉬케가 되면, 범사가 진리가 됐는데, 이 세상 모든 게 다 진리로 읽혀지게 되면 그게 강건 이라는 것이라는 말이에요.
구원받은 사람은 병도 안 걸리고 범사가 다 잘 된다는 그런 말이 아닌 것은 성도의 대표적인 표시는 고난입니다. 성도는 이 모든 현상계의 것들, 예수도 성경도 교회도 목사도 설교를 통하여 진리를 읽어내는 겁니다. 어떤 진리가 내 안으로 들어오면 그걸 말씀이라 그래요. 그 진리의 말씀이 일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일을 합니다.
율법과 성경은 ‘의’의 차원으로 읽혀져야 되는 거지 도덕, 윤리의 요구 사항이 되어 버리면 여러분은 예수의 죽음을 안 믿는 분들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율법이 의가 되지 못하게 된 셈입니다. 그들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라 하지요.
성경에서 가장 빈번히 대조되는 게 영은 생명, 육은 사망이에요. 죄와 사망. 육이라는 것 자체가 죄와 사망이라는 거 이걸 본질로 갖고 있다는 거지요. 육은 사망과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육을 절대 안 받으세요. 진리로 해석되지 않는 표피적인 성경만을 가지고 하나님 요구사항인 양 이해하여 열심히 행하면 그게 심판의 근거가 되는 ‘자기 의’라 하지요. 외적 지상주의가 아니라, 내적 진리 지상주의로 살아야합니다.
표피적인 세상 변화나 세상 가치 속에 담긴 진리로 기뻐하고 진리만을 가치 삼아 사는 게 성도인 거지요. 그러면 현상계를 자연인들과 다르게 볼 수 있어요. 꽃이 지는 게 왜 슬퍼요. 이 땅에 꽃을 도저히 피울 수 없는 무화과 같은 저주 받은 나무에 샤론의 꽃이 붙어서 그 꽃이 떨어지므로 생명의 씨가 생기는데 무화는과는 꺾꽂이로만 번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은혜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을겁니다. 꽃이 떨어짐으로 내가 하나님 씨를 가진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현상계 속에서 진리를 읽어낼 수 있다면 세상에 유혹되지 않을겁니다.
현상계라는 것 자체가 99.9999% 다 진공이고 빈 거라니까 말씀이 빠지면 헛것이라는거지요. 사도 요한의 말처럼 그 어떤 것도 말씀과 관계없이 지어진 게 없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 말씀으로 지어진 거라면 세상을 진리로 읽어내는 사람에게 세상 껍데기가 가진 가치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비슷하게 흉내 내는 것, 모형을 그리스도로 오해해버리면 이걸 엔타이 ‘크라이스트(Anti Christ)’라 그래요. 교회 안에서 여러분이 엉뚱한 하나님을 배우면 여러분은 적그리스도를 믿는 게 되는 거고 그의 한 부분이 되는 거지요.. 적그리스도는 비 진리, 거짓말, 대적하는 말이 회자되는 율법주의의 기독교가 바로 복마전의 총화인 셈입니다.
성경은 비 진리를 설교하는 자들을 거짓 선지자라하고 그들도 다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성경 이야기를 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모두 교회 안에 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짐승과 용의 라인으로 이어지고 그 전체를 총칭하여 사단이라 그래요. Satan 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를 그대로 음역한 거지요. Satan의 사전적 의미는 대적자, 대항하는 자입니다. 고유명사가 아니라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 일반명사지요. 반드시 대적자로 해석해줘야 됩니다.
율법으로 곡해된 가짜 말을 전하고 말을 듣고 감동하여 화답하며 돈도 내고 봉사까지 해 주고 소통하는 그곳이 복마전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라고 이름이 붙어 있지만 주님의 말로 바꾸면 강도의 굴혈, 그래서 주님은 율법주의와 인본주의에 푹 젖어 있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네 아버지는 마귀라고 서슴없이 말씀하신 거지요. 네가 마귀의 아들이니까 마귀 새끼야, 이런 말이 아니라 네가 믿고 있는 그 하나님, 그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분은 사실은 마귀야. 대적 자로 가짜 진리라는 뜻입니다.
예배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 아버지는 분명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일 거라고 굳게 믿어요. 이스라엘이 굳게 믿고 그 하나님 아버지를 만든 금소는 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뱀 풀어서 그들을 다 물어버린 거지요.
(2) (율법과 옛 성전과 방언?)
살인하지 마, 간음하지 마, 안식일 어기지 마. 어기면 돌로 쳐 죽인다고 했지요. 산상수훈에서 살인과 강간은 뭐라고 했지요? 제사, 희생제사, 도륙해서 드리는 그런 행위로 구원받겠다고 하는 게 살인이었고 간음은 성자이신 그 신랑을 오해하여 율법이라는 남편과 같이 연합하는 것이라 한다. 살인하고 간음하면 율법으로 오신, 예수 돌에 맞아 죽게 되는 겁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가 죄 짓게 하는 돌이야. 그래요. 죄 짓게 하는 돌. 그냥 우리가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상으로 우리가 정의해 놓은 그런 어떤 지저분한 일 정도가 아니라 진짜 죽음에 이르는 그 죄 짓게 한다고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흉내 내는 그 죄. 성경을 소리로 보면. 그럼 성경을 어떻게 읽으면 그렇게 소리로 읽어서 멸망에 이르게 되는지 바울의 이야기를 빌려서 살펴보지요.
<고린도전서 14: 4>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방언, 랄랄라 하는 못 알아 듣는 말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글로싸,’ 혀나 말이라고 바꿔도 해석해도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불의 혀처럼 임했다라고 했을 때 그 혀가 방언이란 단어에요. 그게. 그런데 그 말. 말이 소리로만 들려 진의가 전해지지 않는다면 그건 못 듣는 것이니 내용을 방언이라합니다.
방언이 내용으로 통역되면 예언이라 그래요. 그리고 그 방언을 그렇게 예언으로 통역하면 통변이라 하지요.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 여기서는 중얼대고 아무도 모른다면 쑈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방언과 통역, 예언이라는 건 알아듣지 못하는, 그 소리소서의 그 말을 누군가가 열심히 통역하는 열심을 통하여 예언으로 번역해서 들려주는 거지요. 5절을 보시지요.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이걸 갖고 신비주의 교회나 오순절파 교회에서는 전부 방언해야 하고 안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의를 진리로 전해주려면 성경을 갖고 설명해야 될 거 아니에요?
그 성경이 진의로 전해지지 않으면 그게 방언이라니까요. 그러나 진의가 전해지든 아니든 간에 그게 있어야 진의를 알 수 있다는 거지. 그래서 바울은 나는 너희들이 다 그 방언하기를 원해. 반드시 있어야 되는 가치 있는 거야. 우선은 율법과 성경말씀 갖고 얘기 해. 그런데 단 조건은 통역을 같이 해서 내용이 뭔지도 같이 전해야 그게 예언이되는거지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들은 다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거지요. 심지어 죄와 악, 가난과 어둠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 사용될 때 그 자체로 가치를 발휘하게 되는 거예요. 죄 밖에 없는 세상에서 거룩한 하늘의 의를 뭐라 가르칩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면 세상에 의가 없다는 말이죠지요? 그러면 의가 없는 세상에서 하늘의 의를 뭐로 가르치지요?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서 그것이 아닌 것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다니까요. 생명은 예수 안에만 있다 그래요. 그럼 생명 없는 이 세상 속에서 그 생명을 가르칠 수 있는 건 선악의 열매와 율법을 주어 그것이 아닌 것이 생명이야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러면 교회에서 우리가 말씀과 율법이라는 걸 통하여 죄가 무엇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그걸 가르쳐주지 않고 무조건 ‘죄 짓지 마!’ 라고만 하면 그 죄가 뭔지를 모르고 의를 알고 생명을 갈르치고자 무조건 착하게 살아, 성숙해야 돼, 성화해야 돼, 라고만 가르치면 어떻게 그들이 생명과 의를 알겠습니까? 오늘날 기독교의 목적과 가르침은, 그것도 건전한 교회의 가르침은 전부 그 수준에 머물러 있는 수준입니다.
율법도 성전도 죄도 악도 예수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서 하늘의 묵시를 계시하는 데 사용되면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거지요. 죄가 아니고 율법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어떻게 진리를 압니까? 깨달았을 때, 죄는 나와 상관 없게 되어 나는 용서의 상태가 되는데 무조건 착해지라고 하니, 깨달음 없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진리 안에서 볼 줄 아는 사람이, 그 속에서 하나님 계시를 읽어낼 때 그건 비로소 가치를 갖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어거스틴이 오! 거룩한 죄여!라고 외쳤답니다. 내가 그거 없이 어떻게 이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알게 되었겠는가?
성전을 진리로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그 옛 성전은 그 자체가 죄이니 거기서 나오지 않으면 죽는 거지요. 하나님은 그들이 그 성전에서 행하는 일을 악이라 부르고, 그찔레요, 가시라 그랬지요. 그리고 거기서 나오라고 했는데 어떤 이들은 그 속에 들어가서 진리를 누리더라는 겁니다.
마치, 예수가 어떤 이들에게는 살려주는 돌, 산돌이 되는 반면에 어떤 이들에게는 거치는 돌, 멸망시키는 돌이 되는 거지요. 예수가 성경이라면, 어떤 이들에게는 성경이 살리는 생명의 책이 되는데,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어떤 이들에게는 심판의 책이 되는 이유입니다.
(3) (성경의 오해)
여러분이 성경, 예수, 십자가 이런 것을 깨달음 없이 표피적으로만 보면 그것이 여러분을 죽이는 사단, 뱀이 되는 거지만 그 죄의 모양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 사랑을 진리로 읽어내어 내 마음으로 받게 되면 그에게는 그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씀은 살리는 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의 모양으로 왔다라고 하는 거지요. 그 모양을 그대로 읽어버리면 예수가 죄란 뜻이지요.
마찬가지로 성경을 있는 모양 그대로 읽어버리면 성경이 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죽이는 책이 된다는 겁니다. 그 말씀을, 살려주는 영으로 내 안에 갖게 되고 그걸 이웃에게 흘려주면 내가 살리게 하는 영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산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과 그 만물이 존재하는 원리가 과학이라는 것에 의해서 밝혀지고 정리가 되어져 가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그걸 Fact로 인식하고 동의해버립니다. 자연은 이런 거야? 원리는 이런 거야? 그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과 신성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이 세상을 축약해서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게 ‘호 코스모스’라 했어요, 성경이, 헬라 사람들이 성전이라고 읽습니다. 이 세상을 그대로 이렇게 축약해 놓은 게 성전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가 성전으로 오셨다 하시고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기록했다 하셨습니다.
그러면 세상, 성전, 성경, 예수는 같은 내용으로 껍데기를 갖고 있는 셈이지요. 이 세상을 그대로 인식하고 이 세상의 희로애락, 현상과 환경과 사건에 묶여버리면 여러분은 세상 종으로 사는 거와 다름이 없습니다. 세상풍속을 좇는 자가 되어 멸망한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상식으로 행해버리면 여러분은 세상에 묶이는 거지요. 마찬가지로 예수와 십자가를 진리로 보아내지 못하고 무조건 믿음의 대상으로 갖고 가면 여러분이 거기에 묶이는 꼴이 됩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걸림돌입니다. 죄의 모양은 그 모양에 갇혀 연합되어 죄가 된다는 그런 뜻이란 말입니다.
예수,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진다고 하셨는데 그 말은 우리가 그 십자가에 매달려야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예수 십자가가 자기의 죽음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절대로 산 존재일 수가 없구나하고 그 십자가의 죽음이 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식하게 되었을 때, 그걸 생명이라 합니다. 내 십자가라는 자각과 인식과 경험이 있어야 비로소 생명으로 변하여 부활하게 됩니다.
세상에 휘둘리면 육의 생각으로 사는 거고. 그것을 하나님의 원수라 합니다. 그 원수라는 단어, ‘에크드’는 ‘에크드로스’의 여성형으로 성만다르고 같은 단어지요. ‘에크드로스’는 히브리 사람들이 사탄과 혼용하던 단어지요. 사탄이란 대적 자, 육신의 생각, 호 코스모스 세상, 현상계에 머무는 것이 사단, 하나님의 대적 자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반대편에 제물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것을 사단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저기다 두고 열심히 나의 유익을 위해 섬기는 그들이 사단이라 하지요. 우리 육신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면 안 되는 것, 반드시 버리고 가야 하는 거지요. 어떻게 버릴 수 있는가의 내용이 본문 9절과 10절에 나오는 거지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 즉 하나님 영이 있으면 너희의 몸은 죽은 자, 그 땅은 ‘하야’ 지요. 이 ‘하야’ 라는 동사에서 여호와라는 단어와함께 나오면 “그냥 존재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진리를 우리에게 말하기 위해 누군가의 소리가 필요하고, 그걸 소리내기 위해선 여러분은 그 씨를 갖고 있어야 되는 거죠. 그런데 그 씨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말로 줄 수 없으면 그건 존재도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 말이 없으면 성경이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땅은 ‘토후’, 혼돈하고, ‘보후’, 공허하다해요. 내가 너희들에게 믿음과 소망이라는 어떤 상을 갖고 설명할 건데 사실은 그게 실체가 아닌 텅 빈 거라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텅 빈 거야. 혼돈이라는 게 틀이 없고, 공허라는 게 내용물이 없는 거니까 텅비고 없는 거야. 아래 것이 텅 빈 것을 ‘호세크’, 흑암이라 그러는 거예요. 성경이 우리를, 이 땅을 흑암이라고 하는 것은 그게 존재가 없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지 나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둠, 죄를 도덕 윤리로 판단해서, 나쁜 것으로 이해하시면 안 된단 말이지요. 그 흑암이 ‘알’ 전치사와 함께 ‘파님’, 깊음 위에 있다. ‘테흠 파님’, ‘테흠’은 저주의 아래 바다, 아래 물이지요. 저주의 아래 물, 아래 것, 세상이지요.
아랫물, 저주의 바다. 아래 것들의 나타난 걸 성경이 ‘파님’, 헬라어 성경에선 ‘프로소폰’, 얼굴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모세가 돌 판을 갖고 내려왔을 때 칠십 장로가 하나님 얼굴을 뵈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록된 어떤 걸 봤다는것으로 돌판을 본 거지요. 그걸 얼굴이라고 번역하는데 그게 ‘파님’이거든요.
히브리어로 땅이 ‘에레츠’ 라 해요. ‘에레츠’는 하나님이 잡기 시작하십니다는 뜻입니다. 이걸 땅이라 읽습니다. 그러면 땅이라는 건 하나님이 쳐놓은 그물이라는 거지요. 그런데 이 땅은 ‘호게’, 성전이라고 쓴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땅에다가 성경, 세상, 성전, 땅을 보이게 보여주시고 “그물에 걸려라”하시고 기다리고 계시는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잡기 시작하시는 곳을 땅이라하고 그곳을 성전이라고 한단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그물을 던져 잡기 시작하신다는 의미를 갖고 있고, 그것이 바로 땅의 존재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잡기 위해서 땅이라는 그물을 쳐놓으시고 탄식하며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지요. 그런데 그 속에 사는 물고기들 꼬리 힘이 워낙 강해서 모두가 그 그물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먼서 물고기들이 세상을 배우는 거지요.
창세기 1장 2절에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라는 말은 바로 그것을 염두에 두고 기록된 말이란 말입니다. 깊음을 흑암이라 하자.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에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물을 깊은 곳에 쳐라고 했지만 ‘테흠’ 깊음에다가 그물을 내렸을 때 물고기가 잡혔는데 그물이 찢어지고, 담긴 그릇이 깨져서 우수수 빠져 나간 거지요.
열심히 성전에 가서 희생제사 지내고 율법 지키고 도덕 윤리 다 지키면서 잡힌 것 같은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찢어진 그물 안에 들어가서 헛수고하고 있는 것이라는 얘기지요. 찢어진 그물, 그래서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다시나타낫ㆍ지만 이미 그분은 다른 분으로 오시는 것으로 됩니다. 예수로 죽으시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걸 모형화해 보여주는 거죠?
그 때 다시 그 자리에서 그 제자들을 부르시고 이그물을 이번에는 깊은 곳 흑암이 아닌 오른 쪽으로 던지라 그러지요. 산상수훈애서 배웠지만 오른 쪽은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의미하는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전부 보좌 우편에 있지 좌편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무슨 좌우가 있고, 보좌가 있겠어요.
(4) (누가 적그리스도인가?)
“미혹 하는 자,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 하심을 부인 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즉 그리스도니.” <요한이서 1: 7>
누가 적 그리스도인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육체 안으로 임 하신 것을 부인 하는 자, 여기서 ‘임하다‘는 에이셀코마이난 동사는 현재 형이기에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땅에 오신 것을 부인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육신 속에 그리스도 예수가 영으로 와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2000년 전에 역사적 예수를 추억 하고 섬기고자 하는 자들이 적 그리스도라는 의미다.
예수는 로고스 말씀, 옛 성전으로 오신 분이고 그리스도는 세 번째 성전 하늘이다. 역사가 죽어야 묵시가 현실이 되는 것처럼 모형이 사라져야 그 속에 담긴 진짜가 내 것이 되는 것처럼 옛 성전인 예수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게 된다.
극단적으로 말해 십자가와 피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고자 하는 진리가 가치여야 한다. 그 진리가 깨달음으로 내 안에 하나로 있을 때 내가 아들이되는 것이지 예수를 과거의 타자로 섬기는 한 우상숭배하는 종교인의 수준에 머물게 될 것이다.
(5) (애통함이 위로로 인도한다!)
<마태복음 5: 6>
“5.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팔복의 4번째 내용에 당도했습니다. 주리고 목마름이라는 것과 배부름이라는 전혀 어울리는 않는 그런 조합을 말씀하고 계세요. “주리고 목마른 게 사실 배부름이다”고 이야기하시는 거지요.
산상수훈은 로마 압제 속에서 민속 메시아와 메시아의 지상왕국을 기다리던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고통과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것을 메시아 왕국의 도래로 인식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애통해 하며 가난하며 굶주리고 목마른 게 복이다는 파격을 선언하시는 겁니다.
4장에서 사람들 병을 고쳐주시는 걸 보고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인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 산상수훈을 이야기하는 거지요. 너희들이 맞아, 고된 세상살이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 원래 복 받은 자의 삶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지요. 의역하면 ‘복 있는 자여 그대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니라 그러나 바로 너희가 배부른 자다.’ 복 받은 이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 의만을 의지하는 자리로 밀려나고 자기의 의를 부정당하게 된다는 것으로 그의 삶 속에 나오는 모든 행위가 죄로 규정이 돼버린다는 뜻이고 이 역사 속에서는 심령의 가난과 애통과 온유의 삶을 살게 되는데 그게 진짜 배부름이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나에게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만한 것이 조금도 없는 이것이 바로 심령의 가난함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인 됨의 자각으로 인해서 애통을 가져오게 되고 그런 애통은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 앞에서의 그 겸허함을 그냥 유지하게 되는 온유라 부릅니다.
그 온유는 다시 의의 주리고 목마른 자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거지요. 이 세상에 스스로의 힘으로 의인이 될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전도서 7: 20>
“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로마서 3: 10>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인간들 속에서 생산될 수 있는 의의 요소가 하나도 없으니, 당연히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죠. 나에게 없으니 누군가 나에게 부어주세요하고 부르짖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내 안에 의의 재료나 원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자각한 자들의 삶 속에서 터져 나오는 게 의의 주리고 목마른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도덕과 윤리와 사람다움 등을 근거로 해서 의를 추구하느라 전 인생을 거는 것이 인간들의 본성입니다. 내가 사유하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 주리고 목마르기때문에 바리세인들 같이, 자기 의로 인해 사유하는 것이 있으면 주리고 목마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자기들 안에 뭔가가 있다고 여기는 자들은 헛배가 부른 셈입니다. 자신들이 주리고 목마른 자임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 결핍을 하나님께 읍소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내는 자들이 복을 받을 자들이지 자신들이 스스로 뭔가를 내놓고자하면서 헛배를 두드리는 자들은 하늘의 복과 상관없는 진짜 가난하고 주린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역사를 창조했고, 이 역사는 도대체 왜 존재하는 겁니까?”
“인생은 왜 존재하는 거지요?”
“왜 묵시 속에서 이미 구원받은 우리가 굳이 이 역사를 살아야 하지요?” 이 역사와 인생과 천지만물이 증명해 내야 하는 건 딱 한가지,
“왜 예수가 주인이며 그리스도여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1: 10>
“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11. (그러나)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멸망시킬려고 창조하셨다면 믿겠습니까? 썩어지고 멸망되어질 것들을 목적하여 창조하셨다는데 여기에서 멸망시킬 것들과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멸망할 세상 창조물과 대조되는 것은 영존하시는 주입니다. 멸망할 세상은 영존하시는 주를 드러내기 위한 희생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이 우주만물과 역사는 오직 주 만이 영존하시는 분으로, 참 가치이고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증명하고 드러내는 소품에 불과한 거지요.
이 천지만물은 오직 예수의 공로에 의해서만 시작되고 완성이 되는 하나님의 새 창조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라는 사실입니다. 가건물은 실체가 세워지고자하면 철거가 불가피 한 거지요. 이 역사와 인생, 육체까지도 모두 가건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건물과 실체를 분별하는 눈이 깨달음으로 얻는 분별력이고 이는 통찰력의 혜안으로 발전됩니다.
<골로새서 1: 15>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첫 창조를 묘사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새 창조를 묘사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새 창조에서의 하늘의 만물은 모든 만물보다 먼저 나신 맏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비로소 존재가 된 하나님의 절대 의존적 존재라는 거지요.
7절, 만물은 만물보다 먼저 계신 예수 안에서만 존재다고 선언을 하는 거예요. 17절 후반부, 함께 섰느니라는 그 헬라어 ‘쉬니스타오’로 번역한 건데, place together(함께 서다, 함께 존재하다)이니, 만물은 예수 안에서만 존재일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 예수 밖에 있는 건 다 죽은 겁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만 존재의 실상이고 예수와 함께 서지 않은 것들은 다 죽은, 존재하지 않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거지요. 예수 밖의 모든 만물의 존재성을 전부 부정해 버리고 존재 아니다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을 생명의 원천으로 살아갈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요한은 말씀이신 예수가 창조주이심을 밝히면서 그 안에만 생명이 있다는 말을 한 거지요.
<요한복음 1: 1>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태초에는, ‘레쉬트’.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과 똑같은 말씀)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창세기 1장 1절의 그 태초가 그대로 같이 똑같이 등장하는데 그 첫 창조는 새 창조를 모형 하는 거라고 그랬죠? 태초라는 창조의 자리에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가 계셨어요. 그분이 모든 걸 창조하셨다고 하면서 그 분을 통하지 않고 지어진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3절, 4절을 원어로 번역하면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이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 말씀에 의해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 역사와 인생 그리고 우주만물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 주인이 누구인가를 규명하는 것이며 예수라는 거처에 들어가는 방법 이외에는 존재로 설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는 걸 증명하는 말흠이지요.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했는데 예수 안에만 생명 있다고 하니 예수가 생명을 붓지 않은 것은 생명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도는 자신의 긴 신앙 여정을 통과하면서 왜 난 예수가 아니면 죽은 자인가? 왜 난 예수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생명 없음에 불과할 뿐인가를 배우시면 되요. 이것이 의의 주리고 목마른 자인 거것은 하나님의 의가 살아 있음에 필수적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의가 없으면 모든 존재는 존재할 수 없고, 그 의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열심이며 하나님의 생명력이며 그 자체가 ‘바라크’ 복이기 때문입니다.
눈이 있는 이들은 그걸 봐요. 얼리 어댑터 중의 한사람인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이라는 책을 쓴 IT 업계의 전설적인 존재인 니콜라스 카가 그의 책에서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정보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 존재로 익사시켜 가고 있다. 그래서 자기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이런 걸 다 끊었다고 합니다. 어떤 인터넷상에서 가상의 울타리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기도 하지만 사람들을 굉장히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는 거죠. 마치 여러분이 네비게이션이 나온 이후에 그거 없이는 길을 못 찾아 가는 거란 똑 같은 이유입니다.
사고력을 상실한 채 우린 점점 바보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은 결국은 그건 멸망하는 겁니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는 그걸 발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하나님의 계획이었어요.
<이사야서 40: 5-8>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5절에 여호와의 영광과 육체가 대조가 되고 있죠? 육체부터는 성도가 이 역사 속에 육체를 입고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기술되고 있어요.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풀, 꽃으로 비유합니다. 그런데 그 육체 위에 여호와의 기운이 덮이니까 그들이 말라가고 시들어 가지요. 하나님이 이 육체, 인간이라는 역사라는 것 위에 여호와의 기운으로 덮어 말려 죽이는 거예요.
8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영영이 서는 것이 역사의 존재 의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 역사와 인생은 멸망으로 밀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기운이 주도해 간다는 의미로 표현하고 있지요.
망하고 있는 여러분이라면, 성도의 길을 충실히 가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영광 즉,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새 창조의 영광을 찬송하는 자가 되기 위함인 것이고, 바울은 이렇게 정리해 주고 있슷니다.
<갈라디아서 2: 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바울은 갓 잡은 고등어처럼 율법위에서 이리저리 뛰던 사람이에요. 자기에게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으로 믿은 거지요. 그가 복음을 알게 되니까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된 거지요. 자신은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못 박혀 죽은 자라는 걸 알게 된 겁니다.
아 죽은 거구나. 살아있는 이 나는 뭐지? 아 예수 안에서 산 새로운 피조물, 그 예수 안에서 내가 뭘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오직 그 안에서 감사함으로 찬송하는 거지요. 그러면서 만일 의롭게 되는 게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은 것이라고 확인 도장까지 찍어 주시죠. 나는 율법에 의해서 예수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그 어떤 징검다리나 교두보도 만들어 내지 못 했다는 거지요. 하나님 은혜로 그냥 나를 덮었다는 거죠.
성도는 말씀에 의해 애통하게 되고 말씀에 의해서 위로에 이르게 됩니다. 말씀이 좌우의 시퍼런 날로 성도의 죄를 낱낱이 까발리고 성도를 애통의 자리로 몰고 가고 그 말씀이 애통을 알게 해서 성도는 위로를 받는 거예요.
히브리 말의 애통과 위로가 같은 단어에 얹혀 있어 애통이 있어야 위로가 있다는 의미잇니다. 애통과 위로는 반대되는 개념이지만 믿음 안에 있는 자들은 그게 이해가 갑니다. 나는 내 세상 죄로 말미암아 이렇게 애통할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거 다 해결 하셨다는 위로가 함께 오는 거지요.
그러나 애통은 사라지지 않고 끝없이 애통하니 미쳐 죽을 지경이지만, 위로도 계속 같이 가요. 말씀 속에서 역사가 묵시로 수렴되어 연합이 되는 필연적 과정인 셈이지요. 나는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애통으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죄와 모든 애통을 다 가져가셨다는 복음의 현실을 굳게 믿는 자에게는 위로가 있습니다. 그건 평생 과업이에요. 어느 한순간에 완료되는 것이 아닌 평생과업인 셈입니다. 평생 그 애통이 현재형으로 여러분에게 붙어 다닌다는 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됩니다.
따라서 설교는 일차적으로 성도를 애통하게 만드는 설교여야 하고,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자신이 자기 방어 기제로 내어 놓았던 수많은 위장과 가면들이 그 말씀에 의해서 전부 벗겨지고 자존심이 무너지고 자신의 무가치함으로 가슴이 찢어져야 되겠지요. 심지어 설교하는 자가 미워져서 설교 끝나면 바로 도망가야하는 것이 정상이 되어야 해요. 그래야 그가 진짜 애통한 사람이지요.
그 애통의 현장에서 예수의 십자가를 붙드셔야 되는 거예요. 따라서 설교는 죄의 폭로와 십자가 이야기 외에 다른 게 섞이면 안돼요. 설교는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지를 끝까지 끊임없이 발가벗기고 그 위에 임한 하나님의 위로, 십자가 그거 외에 다른 이야기가 섞이면 안돼요. 그거 이외에 다른 이야기는 전부 인간의 감언이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애통과 위로가 한 곳에 잘 그려져 있는 곳이 산상수훈 구절입니다.
<로마서 7: 18-25>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사도바울의 애통함이죠.)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하나님은 왜 창세전에 신령한 복을 내려주신 당신의 백성들에게 애통이라는 필수과목을 이수케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 백성들의 창조 목적은 일차적으로 그들의 복 받은 현실을 누리게 하는 데 있지 안씁니다. 여러분이 받은 복, 그 구원, 그 천국의 현실을 누리게 해 주는 데 하나님 나라 성취의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백성들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거지요.
자존심은 상하시겠지만 우리 인간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니 내가 한 행위를 갖고 하나님의 찬송을 받아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도움을 받고 그 분을 찬송할 수밖에 없는 자구나를 깨닫는겁니다.
자신의 처음자리가 어머니 자궁 속의 그 핏덩이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 산 존재로 부름받은 자신의 현실을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 현실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거지요. 어머니 자궁 속의 핏덩이는 어머니 자궁에서 연결된 태가 끊어지면 그냥 고기 살덩이로 죽은 거지요.
자궁과 긍휼은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의 처음 자리, 죽은 흙의 자리, 고깃덩어리의 자리에서 하나님 긍휼이 임하여 생명이 탄생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 은혜가 개입하지 않았을 때 우리가 어떤 자인가를 깨닫게 되어야합니다.
<시편 30: 5>
“5.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여러분은 지금 저녁이라는 역사를 사시는 거예요. 그러나 이미 십자가 위에서 완료된 기쁨이 아침이 오듯 여러분에게 가시적으로 반드시 임할 거란 말입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시편 30: 8>
“8.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4) (하나님 의와 자기의 의!)
나는 죽었지만 인간들은 자기의 처음 자리를 모르고 기고만장해서 에덴동산에서부터 종말의 날까지 인간의 의를 끊임없이 준비하죠.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를 구별합니다.
<로마서 10: 3>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인간들이 도덕이나 윤리, 사람다움 등을 근거로 생산해 내려는 모든 의는 하나님 의를 힘써 복종치 않는 거지요. 애써서 복종치 않는 거랍니다. 바울은 그런 자기의 의를 율법의 의라고도 불릅니다.
<빌립보서 3: 4>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내가 육체를 신뢰하는 것으로 누군가와 비교한다면 나는 자신 있다는 뜻이지요.)
5.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요만큼도 없을 만큼 열심히 살았고, 착하게 최선을 다해서 그런데 그 율법의 의라는 열심이 교회를 세우는 게 아니라 교회를 핍박하는 결과를 낳아서 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키더라는 겁니다.
631가지 율법은 모세 때에 주어진 거예요. 에덴에는 율법이 없었어도 낙원이었어요. 하나님이 벌거벗겨 놓으시면 벌거벗은 채로, 먹으라면 먹고 먹지 말라면 안 먹고 이걸 낙원이라고 그래요. 자기 주체성이나 의지, 뜻, 비전, 야망 하나도 없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경륜되어지고 움직여지는 곳을 낙원이라고 그랬지요.
거기에 선악과 먹지마라는 법이 떨어지고, 인간이 법을 받자마자 실체가 어떤 것인지가 확 드러나는 거예요. 이걸 단순히 죄를 짓고 타락했다라고만 이해하지 마시고 법이 떨어지면 인간은 항상 자기의 존재를 폭로 당하게 되어 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은 신약에서 여러 가지 명령들로 우리에게 떨어져서 우리는 진짜 죄인이 맞구나알게 되는 거지요. 그 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나는 죄인이구나요를 드러내는 것이죠.
여러분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진 게 출애굽해서 홍해 건넌 다음에 주어졌는데 율법을 안 지키면 다시 홍해로 되돌아서 애굽으로 다시 넣어 버립니다. 그래서 갈라진 홍해를 이스라엘이 다 건너자마자 닫아서 못 돌아가게 하지요. 못 돌아가면 그 율법은 왜 줬지요? 너희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라는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를 구했다는 걸 가르치시는 거예요. 그게 광야요 인생이잖아요. 그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1세대를 다 죽여 버리는 거지요.
율법은 하나님의 법 앞에서의 인간의 실존을 드러내는 것임과 동시에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느 지점으로 끌고 가실 것인지를 보여 주는 거예요. 그게 광야 1세대의 몰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법 앞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그 율법 앞에서 어떤 의도 내 놓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의 최고의 의라 자칭하는 것들이, ‘더러운 옷, 똥 걸레(filthy, rag)’라고 이사야에 나오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서 끊임없이 바벨성을 쌓으며 인간들의 의를 세우고 있는 거지요. <로마서 3: 20>에 그러한 역사와 율법의 역할에 대해서 잘 묘사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