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을 상쾌하게 하는 효소!
이 아침이 상큼하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늘 하는 일과대로 해후소에서 신성한 행사를 치룬 뒤에 면도를 한다. 그러나 이 신성한 행사를 동시에 병행하는 재물이 있다. 한 때는 스마트 폰이었지만, 지금은 해후소를 가는 지름 길인 문 밖으로 먼저 향해서 아침 조간신문을 집어 오는 일이다.
한 때에는, 모든 신문에 할애된 지면을 모두 읽고, 관심있는 부분을 가위로 오려서, 언젠가는 스크랩 할 양으로 집게로 크기를 맞추어서 집어 놓을 정도로 신문 메니아 였었는데, 스마트폰 활용 이후로 도저히 신문을 접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핑계가 되었다. 여러 달 동안, 펼치지도 못한 신문들이 구석에 한 참 쌓이더니 이것이 못내 짐이 되어 다시 돌아 오지 않는가?
쌓아 놓은 신문은 마치 매일 한 컬레씩 신다 모아 놓은 양말 마냥, 세월의 흐름을 가늠하게 하는 것과도 같다. 나의 게으름을 탓해 보기도 하지만, 신문 안에 들어 있을 보화를 보고도 수집하지 못하는 광부의 안타까운 마음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모으자니, 세월의 짐이요, 버리자니 내 몸의 일부를 베어내는 아픔이 있다.
몇 달을 참다참다 못해, 경비 아저씨에게 헌 신문들을 모두 내다 가져 가도록하고, 은행세 가서 자동 이체를 마감시키고, 종로구에 있는 신문사 지부 전화 번호를 알아내어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이야기 한 뒤에 드디어 거사를 마감했다. 휴우~~~ 그야말로 긴 대장정을 무사히 마친 가벼운 느낌이었다.
SNS 미디어 발달로 인해서 신문 같은 종이 매체들은 언젠가는 역사의 뒤안 길로 가는 수순을 운명처럼 받아 들여야 하겠지만, 우리 같은 노틀들에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신문이라는 종이 매체로 부터 단절 될 경우에 감당할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리라.
신문도 어느 면에서는 인생의 좋은 동반자이지만, 한 편으로는 중독성이 있는 물질인지도 모른다. 신문이라는 감염 바이러스가 우리 인생을 평생 좀먹고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더 강력한 에볼라 바이러스가 나타나서 에이즈 바이러스 공포증을 물리치듯이, SNS의 출현이 신문으로 인한 중독증을 치유하게 했다.
이렇게 중독증은 더 강력한 중독으로 가벼운 중독증(?)을 치료하게는 것이다. 결국 인간들은 중독증세를 품고 사는 생명체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의 섭리란 바로 이러한 중독 증세로 인한 현상이 아닐까? 스스로 되어지는 대로, 물 흐르듯이 따라 가게 하는 것을 우리는 자연의 섭리라고 한다. 그리고 이에 순응하도록 주문되어 지는 인간은 자연의 섭리에 중독된 존재일 수 밖에 다른 선택을 부여 받지 못한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들이다.
자연의 섭리를 운명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 인간들 모두는 운명이라는 바이러스에 지독히들 중독된 존재들이다. 그러니 무엇을 탓하리? 신문을 탓하리? SNS를 탓하랴? 나를 탓하고 인류 전체를 탓하고, 자연을 탓하랴?
그래서 다짐한 것이 하나 있다.
“누구를 탓하기 전에 먼저 내 자신을 포함해서, 우주만물을 용서하고 포용하라.” 용서와 포용을 신봉하고 섬기는 최고의 중독 바이러스가 되게 하라.
문제는 이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에 달려 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내린 결론, 신문과 더불어 살되, 이른 아침, 해후소에서만 상면하도록. 그래서 다시 조간 신문을 동반자로 초청했다.
이 아침이 상쾌한 이유가 바로 신문이라는 바이러스를 내 기쁨 효소의 발효 원천으로 했기 때문이다. 인생은 이렇듯 각 자가 생각하기 나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