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신라인을 평가한다!
필자는 대구 종로에서 태어나고 대구 중앙통에서 자라났으니 경주인이 아니라해도 토백이 경상도 신라인이라 선포해도 그리 하자가 없다.
그러나 지금껏 한 번도 본인이 신라인이라는 개념이나 자존감이 없었던 것은 현대에 사는 어느 누구도 신라인, 백제인, 고구려인이라 부르고 사는 정신 나간 얼빠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냥, 신라인이라는 호칭대신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이란 자부심이 있고, 장래 비전이 있다면 동북아 중심시대를 이끌어갈 통일 대한반도의 자랑스러운 일원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요즘 흔하게 나타나는 순수혈통 민족주의라든가 극우적 사상을 주장하고픈 사람은 더구나 아니다. 오히려 인구단절의 백세시대에 생존하고자 하는 다윈의 적자생존 이치에 적극 적응하고자 몸부림치는 글로벌 혼혈주의에 적극 동의하는 사람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과거의 어느날에 필자에게 번개를 맞은 듯 온 몸을 감전하는 찌릿한 강한 자극을 받은 날이 있었다.
그 말인즉슨, 바로, “당신은 신라인이야. 신라인이라면 당연히 삼국을 통일한 신라인의 기개로 이 나라를 선도하면서 세계를 향한 발돋움의 몸부림을 솔선수범 보여야하는 것이 아닌가? 신라인이라면, 비겁하게 겸손을 가장한 무능력을 보이는 대신에 당당히 앞에 나서서 왕손의 피를 이어 받은 자로서 시대의 사명감으로 당당히 앞에 나서서 책임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혼돈에 빠져 동서남북으로 갈라진 지금의 이 나라를 세계 속의 글로벌 대한반도로 새로이 세우기 위해, 책임 있는 자가 나서서 바른 길을 가도록 지도(?)해야 할 것 아니냐? 는 강요(?)였다.
너무나 정상적인 사람이, 너무나 뜻밖의 이야기를, 너무나 정상적인 자리에서 너무나 정색을 하면서 들이대고 있으니, 그때 필자의 당황하는 모습은 가히 가관이었을 것으로 쉬이 짐작할 수 있겠다. 때늦은 시대에 엉뚱한 자리에서 신라인의 도리를 강요 받고 있으니,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지만, 그렇다고 농으로 넘기기에는 너무나 진지했던 역사적 고증이나 솔직하고 진솔했던 그분의 태도에 오히려 흐트려졌던 몸매무새를 가다듬고 자세를 바로 잡고 황망하게 사과한 쪽은 필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때의 아름다웠던 기억을 남기지 못한 채로 지냈는데 오늘, 페북을 통해 다시 필자의 뇌리를 때리는 천년 신라의 고도인 경주, 나혼자 경주 여행, 일상의 고고학을 만나서 퍼뜩 지나갔던 추억을 되집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어디 이 시대에 무슨 신라 백제 고구려인의 의미 부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 이 때, 이곳 대한반도에 머물면서 숨쉬고 사는 모두가 신라인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다만, 과거 신라인들이 가졌던 왕손의 기개로 새로이 세계 속에 우뚝 선 대한민국의 비전을 향해 함께 달려갈 수 있도록 각자가 각성하라는 충언으로 여기고 싶을 뿐이다.
♡도천 곽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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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싶을 때, 경주
<일상이 고고학 : 나혼자 경주 여행>
경주를 백 번도 넘게 가본 경주 마니아의 경주 여행기!
– 전국의 역사선생님이 좋아하는 경주 역사책!
– 책을 읽으면서 함께 여행하는 느낌!
– 역사적 깊이가 정말 대단합니다. 경주에서 신라의 흔적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찾아가는 그런 느낌!
1.
신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큰 무덤을 만들었을까?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애매모호했던 구절들이 살아나와
“능의 외형을 보았으니 그 다음은 그 안에 담긴 보물을 만나러 국립경주박물관 차례다. 신라인들의 유별난 황금 사랑과 금관을 확인한 후, 우리에게 김춘추로 더 익숙한 태종무열왕릉으로 향한다. 근처 조선시대 때 진흥왕, 진평왕, 헌안왕, 문성왕이라 이름붙여진 능들이 진짜가 아님을 슬쩍 고증한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지금껏 신라 고분을 충분하게 감상한 눈으로 바라보면 현재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헌안왕, 문성왕이라 이름이 붙어 있는 산 위의 여러 고분들에서 왕릉의 권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결국 조선 시대 눈으로 맞춘 무덤일 뿐이라고.”
2.
여행의 하이라이트 문무대왕릉
삼국 중 가장 힘없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과 맞서 싸워 여러 번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던 고구려, 귀족적인 미감으로 신라뿐 아니라 가야와 일본에 까지 문화를 전달했던 백제, 이러한 강국들을 제치고 신라가 최종 승리한 이유가 궁금했던 저자는 문무대왕릉에 이르러 그 해답을 찾아낸다. 이견대에 올라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며 문무대왕의 아들인 신문왕의 효성에 감정을 이입해본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뜻으로 수장을 요구한 문무왕, 문무대왕릉은 단순히 바다 위에 있는 능이 아니라 국경선에 위치한 능이었다. 문무대왕릉은 바다에 위치한 바위섬으로 땅에서 불과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왕의 묘를 수장한다는 생각의 반전, 게다가 신라 왕릉의 규모를 염두에 둔다면 문무대왕릉은 당시의 관념에서 상당히 벗어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만파식적 이야기와 함께 감은사를 둘러보며 문무왕이 한국 역사에서 상당히 저평가되었음을 한탄하며 이 주제에 강한 의욕을 보인다.”
3. 석가탑과 다보탑의 의미는 불국사를 이해하는 핵심
불교 세계관의 독자적 확장을 이룬 통일 신라의 자부심을 엿보다
“석가탑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다라니경이 발견된 탑으로도 유명한데, 과거에는 무구정광탑, 서석탑이라 불렸다. 무구정광불법이란 탑을 수리 내지는 중수하는 것만으로도 탑을 세우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는다는 의미로, 이는 수많은 신자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덜 지우면서도 불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불교 신앙에 대한 접근성과 지속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던 묘안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탑 안에 들어간 석가탑은 왕과 귀족의 신앙을 넘어 신라 불교의 대중화를 선언하는 탑이기도 했다. 반면 다보탑은 한반도에 처음 만들어졌던 탑의 형태인 목탑을 돌로 다시금 재현함으로써 탑의 기원을 찾는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결과적으로 다보탑과 석가탑을 통해 신라 불교 세계관의 확대, 그리고 탄탄한 족보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도와 중국으로부터 부처의 말씀(다보탑)을 신라가 받아들여 불교가 시작되었으나, 결국 신라인들은 자신의 것으로 이를 완성(석가탑)시켰다는 이야기다.”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경주 여행>”
-황윤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