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망해야, 비로소 신약이 완성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한 이스라엘과 신세대 주자인 대한민국?
마지막 고지인 하나님 구원의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두 선택 된 민족의 관계를, 종말의 이 때를 맞이해서,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하고 또 전개 될 것인가? 에 대한 많은 이론이 난무해서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혼돈스러울 수도 있다 하겠다.
필자의 경우에는 마크로한 스코픽으로 해석해서, 이스라엘은 구약을 상징하는 것이고, 이방인의 대표주자인 대한민국은 신약을 상징하는 것 아닌가 하는 선을 그어 본다.
물론, 예수를 주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주 안에서 구별 없이 하나로 되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여기서 구약과 신약을 인용하는 것은, 성경이 많은 부분 상징으로 표방하고 있기에, 그에 따른 분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는 메시아닉에 대해서는 믿응의 형제 외에는 특별히 따로 드릴 설명은 필요 없다 하겠다.
다만, 로마서 9-11장 까지 언급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과의 관계성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믿음의 원조로서 이방인 출신 믿음의 형제들에게 특별 대우를 간곡히 부탁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선택된 관계로 그 기득권을 강조하려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들의 신실한 신앙을 위하여 특별히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 들이지 못하는 불쌍한 이스라엘 민족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메시지 전달의 요소가 강조된 것이라 하겠다.
성경에서 구약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입장을 제일 잘 나타내는 부분은, 세례 요한의 행각을 살펴 보면 잘 이해 될 수가 있다. 그는 신약이 시작 되는 예수의 공생애를 시작하게 한 바로 그 장본인이 아닌가?
어떻게 보면, 세례 요한은 예수라는 복음의 등장과 더불어 끝을 내어야 하는 구약의 마지막 인물로 상징이 된다고 하겠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그의 비극직 죽음과 동시에 예수 복음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세례 요한도 이 사실을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후패해야 하겠고, 그는 성해야 하리라”고 고백한 내용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더불어,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도 이 점에 대해서는 크게 오해를 하고 있는 부분인데, 예수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신 말씀에서, 이를 마치 “율법이 은혜의 시대에서도 변함 없이 존중 되어야 한다”는 식의 내용으로 잘못 강조 되면서 현대 교회의 폐단으로 몰고 가는 대표적인 실례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율법의 완성이란 구약의 율법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의 주체인 사랑과 은혜에 그 강조의 포인트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구약의 율법이란, 어디까지나 신약인 예수를 세우기 위해, 드려져야할 희생 재물에 지나지 않는다. 세례 요한의 목이 쟁반 위에 담겨진 것처럼, 구약의 율법은 철저히 진리의 실체인 예수 복음 앞에서 그 생명력을 뿌리채 뽑아져야 하는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구약의 율법이 사랑과 은혜로 철저하게 바껴지지 않는 한, 신약의 사랑과 은혜로 이루어져야할 영혼 구원의 역사는 요원할 뿐이라고 하겠다. 사랑은 허다한 것을 덮는다. 그 위대한 사랑을 한낱 폐기될 율법의 틀 위에 머물러게 해서는 어찌 그 능력의 날개를 넓히 펼칠 수가 있겠는가?
세상 끝까지, 이방인에 의해서, 복음의 신앙이 완성 될 때에, 비로소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고 성경에서 이르고 있다. 이스라엘의 회귀는 종말의 때를 예표하고 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그들이 부분적으로 개가 천선해서 메시아닉과 같이 예수를 주로 믿는다고 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것은 하나도 없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남은 상징은 종말에서 찾으면 된다. 기독인들 사이에 그들의 조속한 회귀를 위해서 행해지는 많은 기도와 물질적인 도움을 다른 전도와 선교와 구별해서 하고자 요란스럽게 떠들어 대는 것은 지극히 비 성경적인, 넌센스라 아니할 수 없다.
어쩌면, 이스라엔 운운하면서, 대규모 시위를 하는 것 보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긍휼함에서 아프리카 난민들은 도와 주는 수준으로 봉사 활동하는 것이 훨씬 이웃을 위한 사랑의 실천을 하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적어도 여기에는 무지함에서 오는 교만의 죄는 없기 때문이리라.
이스라엘은 망해야, 믿음의 형제로 하나님 백성으로 다시 돌아 오고, 비로소 신약이 완성된다. 우리의 무지와 교만으로 그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이 하신다. 이스라엘을 돌아 오게 한답시고, 행해지는 모든 발걸음은 헛 수고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사탄의 행각으로 지탄 받을 것이리라.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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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예수 믿는 유대인’ 어떻게 봐야 하나》
“유대인의 특권과 지위의 중요성, 마땅히 인정해야”
“유대인이 누구인가와 그들의 나음에 대해 성경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로마서 9~11장이다. 이는 로마서 1~8장의 결론이요, 12~16장의 서론이기 때문”이라며 “하나님은 구약에서 선택한 유대인에 대해 신약에서도, 아니 주 예수의 재림 시까지 똑같은 신실성과 열정으로 돌보고 있다는 것을 이 본문이 역설하고 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한국교회는 로마서 9~11장을 로마서의 괄호용법이나 부록 정도로 여기면서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부해 온 잘못을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며 “이스라엘의 과거, 현재, 미래를 논하는 성경의 가장 놀라운 본문인 로마서 9~11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스라엘’이라는 단어가 11회 사용된 바, 이방인 신자나 그리스도교회 전체를 지칭하는 의미로는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는다. 그 어디에도 ‘이방인’ 중심의 교회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계승하는 ‘새 이스라엘’이나, 혹은 이방인이 그 이스라엘의 자리를 대체했다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성령이 내주하셔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나 ‘옛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외치는 새 피조물이 된 것이다. 이 새 사람의 필수 구성요소가 유대인과 이방인인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라며 “장로교 언약신학이 ‘구약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신약의 교회로 대체됐다’는 ‘대체신학’으로 빠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까지 교회론과 선교신학에 있어서 유대인의 위치와 사명 및 유대인 선교에 대해 한국교회가 무지해 왔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반성해야 할 것”이라며 “구약의 이스라엘 언약공동체의 모판(출 19:5~6)이 정확히 신약의 교회공동체(벧전 2:9~10)에 적용되고 있는 것은,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합이 결코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도 이방인도, 그 어떠한 것도 다 없어졌고, 전혀 새로운 피조물, 즉 ‘원뉴맨’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아울러 김 교수는 “이스라엘이 2천 년이 다 되어서 어찌어찌 하다가 운 좋게 독립 만세를 외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며 “왜 그들은 다시 돌아왔는가.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는 성경을 다시 들추어야 한다. 과거의 관점을 버리고 새롭게 성경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유대인의 특권과 지위에 대한 중요성을 마땅히 인정해야 하며, 그들을 사랑하고 지지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다음으로 정연호 교수(University of the Holy Land 부총장)는 “이스라엘의 비전과 역사적 현실, 그리고 한국교회”를 제목으로 발표하며 “구약은 신약과 함께 기독교회의 경전이 돼 왔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구약은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치부되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율법이 완성됐으므로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는 생각에 지배돼 온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정 교수는 “서구교회(이방교회)가 속사도 시대 이래로 ‘메시아닉 유대교회’에서 거리를 두다가 4세기 이후로는 적극적으로 관계를 단절하게 된 배경에는 대체신학과 반유대주의가 자리잡고 있다”며 “이는 식물의 줄기가 스스로를 뿌리에서 잘라내는 생명 단절행위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은 교회에 의해 대체될 시한부 용도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이 아니요, 구약의 말씀을 메시야의 말씀(신약)에 의해 폐기될 성질의 것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며 “이제라도 메시아를 통해서 이스라함의 후손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영양의 젖줄인 구약, 곧 히브리인의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끝으로 ‘성경이 말하는 ’70년 회복’의 의미와 이스라엘을 향한 한국교회의 비전과 사명’을 제목으로 발표한 권혁승 교수(서울신대)는 “한국교회가 이스라엘 선교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역사적으로 한국은 반유대주의 경험이 없었다는 점”이라며 “서구기독교 역사는 그 자체가 유대인을 적대시하는 반유대주의로 점철돼 왔다”고 했다.
권 교수는 “이스라엘 독립 이후 급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유대인 교회가 ‘기독교인’이라는 명칭 대신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자’라는 뜻의 ‘메시아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그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라며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영적으로나 민족적 정서에서 이스라엘 선교를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된 이점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남북통일이라는 큰 복을 우리 민족에게 주신다면, 그것은 한국교회가 해야 할 막중한 과제가 있기 때문”이라며 “그것은 마지막 시대 ‘땅끝’을 향한 선교적 사명이다. 130년이라는 짧은 선교 역사에도 미국에 이어 제2의 선교대국으로 성장한 한국교회는, 새로운 관점의 ‘땅끝’ 선교를 준비해야 한다. 곧 그동안 주력해 왔던 이방인을 향한 ‘땅끝’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한 ‘땅끝’, 바로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이스라엘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그릇이면서 그 말씀을 바르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거룩한 창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지니고 있는 언어와 역사·지리·문화를 가까이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더 가까워지고 선명해진다”며 “그런가 하면 고난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 온 이스라엘 민족의 지나간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혜의 보고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의 잘못은 제외돼야 할 것”라고 했다.
권 교수는 “또한 이스라엘은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섭리하며 이끌어 가시는지를 보여주는 종말신앙의 풍향계 역할을 한다”면서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가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에 관심을 두는 것은, 곧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더욱 성숙하게 성장하는 기회와 통로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