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사의 죽음에 대한 고찰!
세상에는 참 별 일도 많다.
어찌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야할 유명 목사가 한창 빛을 발할 때에 버젓이 보란 듯이 갑자기 자살로 그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마감해야 했을까? 아무리 머리를 이리 저리 굴려 보아도 이해할 수 있는 마땅한 변명을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까운 마음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2013년에 일어난 일이기에 이제는 잊을 만 했는데, 오늘 아침에 필자의 눈에 다시 띄게 된 것은, 아마도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서 죽지 못해 구차하게 살면서 오늘의 힘든 하루를 감당해야 하는 우리 모두들에게 주는 살아 있는 새 교훈으로 마음판에 새기고자 하는 선의로 해석해 본다.
아침 페북에서 만난 기사는 2014년 중앙일보에 난 짧먁한 기사였다.
내용인 즉, 미국 남가주 지역에서 자실한지 1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새 목사를 청빙하지 않은 채, 목사가 죽기 전 녹화해둔 동영상을 통해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고, 이를 교계에서는 받아 드릴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목사도 아니요, 자랑스럽게 죽은 목사도 아닌,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택한 목사를 통해서 과거에 남긴 동영상으로 드려지는 예배라고 하니, 영광과 찬양을 드러야할 거룩한 예배 절차에 비추어 볼때에 과연 이를 어떻게 받아 드려야 할까?
백에 백 사람은 이 예배를 불순하고 망측한 예배로 받아 들일 것으로 상식적으로 이해되어 지고, 페북 뿐만 아니라, 다른 매체에 나타나는 현상도 이를 반영하듯, 부정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2년부터 서울 강남 반포 지역과 더불어 2004년에 처음 미국 LA에 설립된 교회에서는 동영상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가 늘어나는 것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십일조의 참여도가 줄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가 사회 현상을 평가할 때에 잡는 지표가 있다.
그것은 얼마나 조직의 구성원의 참여도와 충성도가 높은가?
그리고 조직이 원할하게 돌아 가고 있고, 지속성있는 운영이 가능한가? 하는 기본 요소일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는 분명히 죽은 목사의 동영상 예배는 매우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사실 세상 교회치고 목사가 버젓이 살아 행세하는 데도 불구하고, 교회의 사이즈에 관게없이 끊임없는 잡음이 일어나고 있고 이런저런 모양으로 교회의 분란을 겪지 않는 교회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면에서는 이를 비방하고 실망하기 전에 이러한 교회 내의 소음과 분란도 살아있다는 증거로 여길 수도 있지 않을까? 살아 있는 한, 끊임 없는 분란을 통해서 변화를 시도하게 되는 것이 또한 생명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영적 사업에서도 살아 있는한, 생명 작업의 진화를 위해서 부셔지는 과정에서 갈등의 연속이 자연스레 일어나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한,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죽음을 하나의 큰 변화라는 굴레 속에서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어느 혈기 있는 청춘치고, 젊은 시절에 한 번쯤, 죽음을 고민해 보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겠는가? 살아 있는 자는 누구나 자연스레 죽음을 동경(?)하는 것도 살아 있는자의 특권(?)이라고도 비약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세상에는 일어나지 않을 현상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겸손히키 받아 드려야 한다.
‘나에게 일어나면, 로멘스요, 남에게 일어나면 불륜’이 되는 것이 결코 평등한 사회가 아님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현실은 언제나 불평등한 결론으로 막을 내리는 것은 아마도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니겠는가? 멀쩡했던, 사랑 받았던 한 목사의 어쩌구니 없는 죽음이 목사이기 때문에 특별히 다루어져야할 특별한이유는 없다. 그낭 그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고, 이해해야할 것은 이후에 일어나고 있는 남의 평가와 루머가 아니라, 죽음으로 달려갈 수 밖에 없었던 그 당시에 긴박했던 그분의 치열한 갈등에 대해서 먼저 애도를 표했어야 할 것이다.
이제 과거는 과거 지사로 맡겨야한다.
그리고 죽음도 삶의 다른 변형된 행태로 받아 드리자.
자살이니 타살이니 자연사이니 간에, 모두가 죽음의 큰 그릇 안에는 한 가지로 밖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고, 죽음도 광의적으로 보면, 삶의 연장선상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삶과 다른 대상으로 여기는 한, 죽음은 여전히 두려운 대상으로 존재할 것이고, 그 존재로 인해서 죽음을 비방하고 자기와는 관계가 없다고 여기고 싶은 연약한 인간의 모습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묘막측하신 분이라고 한다.
성경의 복음서나 사도행전을 열었을 때에, 당시에 생존했던, 수 많은 사람들이 과연 구원자로 오신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나, 열두 제자들의 순교를 과연 어떻게 받아 드렸을까? 아마도 당시에는 당연히 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부정 되고 미친 사람들로 비춰졌을 것이다.
어찌 구원자 되신 근본 하나님이신 예수가 죽을 수 있는가? 그것도 가장 억울하고 처참한 십자가 처형을 당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이해를 구할 도리가 있었겠는가? 아무도 없었고, 이 시대에 다시 예수가 재림하신다 하드라도 필히 성령의 비추임이 없다면, 이를 이해할 자는 맹세코 아무도 없을 것이리라.
아래에, 어느 페북 페친께서 중앙 일보에 난 이 기사에 대해 목사와 그분의 동영상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에 대한 비난에 대한 필자의 댓글을 붙여 보았다. 위에 프스팅한 내용이 어떻게 독자들에게 투영될 것인가는 필자도 못내 궁금하지만, 시험 정신으로 댓글을 아래에 첨부하여 소개하는 바이다:
살아 있는 사기꾼들이 많으니, 속지 않을려니 죽은 사람의 진심으로 달려 가야 하겠지요. 성도들에게 달리 선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기꾼 아닌 목사, 살아 있는 목사, 이 두 가지를 한 번에 만족하는 자 있으면, 어디 한 번 추천해 보시지요? ㅎㅎㅎ 농담으로 드린 말씀 입니다.
적어도, 사람은 죽어야 제대로 평가 받을 수 있지요.
죽어서 욕을 들어도 싼데도 불구하고, 그것도 자살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지닌 채, 성직자로서는 최대의 불명예 스러움을 간직한 채, 죽었음에도 그의 설교가 여전히 살아서 하는 설교나 변함 없이 감동을 주고 있다면,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ㅎ
적어도 그는 죽었어도 사기꾼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 거랍니다.
최소한의 성도라면, 정치적으로나 교육적으로나, 양심적으로나마,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성도의 기본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에 대한 비방은 물론이지요. 적어도 죽은 자에 대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경의를 표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기본 예의랍니다.
세계적인 인물이 대한민국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남을 인정 못하는 고약한 버릇 때문이라는 것은 자타가 인정하고 있지요. 이제는 우리 각 자가 스스로 교만에서 벗어나, 영으로 거듭난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 안응 곽계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