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야는 어디 가고 나타샤만?
“(길상사에 깃든 자야의 순애보)
원한(怨恨)의 38선을 넘어 함경남도 함흥에서 여자 몸으로 서울로 피난 온 기생 ‘자야(子夜)’의 본명은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이다. 당시 대한민국 3대 고급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大苑閣)’을 설립(1953년), 한국 재력가로 성장했다.
훗날 자야는 당시 돈 1,000억 원 상당의 고급요정 ‘대원각’을 아무런 조건 없이 무소유의 저자 법정(法頂) 스님에게 시주를 했다. 그 대원각 요정이 바로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지금의 사찰 ‘길상사(吉祥寺)다.
평생을 사랑했던 북한에 있는 시인 백석(白石)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살았던 기생 자야는 폐암으로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인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를 시주받은 법정 스님은 창건 법회에서 자야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자야는 법회에 참석한 수천 명의 대중 앞에서 “저는 불교를 잘 모르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제가 대원각을 절에 시주한 소원은 다만 이곳에서 그 사람과 내가 함께 들을 수 있는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녀가 떠나기 전 1,000억 원 상당의 대원각 전 재산을 시주한 것 아깝지 않았느냐? 라는 어느 신문사 기자의 질문에 자야는 이렇게 대답했다. “1,000억 원 재산이 ‘백석’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해요. 내가 죽으면 화장해 눈 많이 내리는 날 길상사에 뿌려 달라”고 했다.
사랑한 사람 백석의 시에서처럼 눈이 푹푹 내리는 날 백석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다비식을 마친 뒤 자야의 뼈 가루는 길상사 경내에 쌓인 눈 위에 뿌려졌다.
자야가 평생을 못 잊어하며 사랑한 시인이자 연인 백석(白石, 1912∼1996)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지만, 아호인 백석을 필명으로 썼다.
백석은 문학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과 훤칠한 키, 빼어난 외모로 당시 많은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구전(口傳)에 따르면 그가 길을 지나가면 여인들이 그를 보고 자지러졌을 정도라고 한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연인이자 기생 자야와의 러브 스토리는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만큼이나 듣는 이의 가슴이 찡 하게 아려온다.
백석은 함경도 함흥시의 영생여고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하던 1936년 회식 자리에서 기생 김영한을 보고 첫 눈에 반하게 된다.
잘 생긴 로맨티스트 시인은 그녀를 옆자리에 앉히고는 손을 잡고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 여자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까지 우리에게 이별은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백석은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시구에 나오는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김영한에게 지어줬다. 그렇게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해 서로가 사랑에 빠져 연인이 된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장애물이 등장한다.
유학파에다가 당대 최고의 직장인 함흥 ‘영생여고’ 영어 선생 이었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탐탁지 않게 여겨 강제로 또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켜 둘의 사랑을 갈라놓으려 했다.
백석은 결혼한 첫날밤에 그의 연인 자야(子夜)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자야에게 함께 만주로 도망을 가자고 제안한다. 그렇지만 자야는 보잘 것 없는 자신이 혹시 백석의 장래를 막아 해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이를 거절한다.
그러나 백석은 자야가 자신을 찾아 만주로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먼저 만주로 떠난다. 만주에서 홀로된 백석은 늘 자야를 그리워하며 그 유명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를 짓는다. 그러나 백석이 잠시 동안이라 믿었던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만다.
해방이 되고 백석은 자야를 찾아 만주에서 함흥으로 갔지만 자야는 이미 서울로 떠나 버리고 없었다. 그 후 다시 6·25전쟁이 터지면서 둘은 각각 남과 북으로 갈라져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다. 그 후 백석은 평생 자야를 그리워하며 북한에서 혼자서 살다가 1996년에 사망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다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흐르는 깊은 산골로 가서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면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함흥에는 지금도 영생여고가 자리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1996년 북한에서 죽을 때까지 내내 자야를 그리면서 혼자 살다가 숨을 거둔 백석의 순애보도 대단하지만, 백석을 그리워하면서 어렵게 세운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를 하고 세상을 떠난 자야의 순정도 너무나 아름다워 보인다.
또 대단한 것은 대원각을 길상사에 봉헌을 하고도 10년 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法頂 스님 또한 이 시대의 위인이다.
1997년 개원법회를 할 때, 김수환 추기경이 개원축사를 했고 2005년엔 김 추기경과 수녀들이 모여 이른바 ‘길상음악회를 열었는데 종교를 뛰어넘는 감동이었다.
특히,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경인TV, 자일대우버스,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이 7층 석탑을 사찰 경내에 세운 것 또한 종교 한계를 뛰어넘어 문학가의 사랑을 기려 종교의 합의 도량이 되기기도 했다.
‘백석과 자야’ 이 두 사람의 슬픈 사랑 이야기는 지금도 성북동 ‘길상사’ 풍경소리를 타고 아름다운 여운으로 길게 길게 이어지고 있다.” -정안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