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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 교회는 십자가 사랑이시라!

그분 자신이 교회이시지요.

그러니 “그분이 교회를 어떻게 보겠는가?”하는 질문의 명제는 wrong 입니다. 이 질문은 그분의 질문이 아니라 그분과 관계 없는 사람들의 하챦은 질문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온유하시고 겸손 하시기에 근본 자신인 교회에 대해 자랑하거나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희생양으로 십자가 위에 못 박으신 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그분의 교회란 십자가로 정의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회란 주님 자신이 생각할 때, 십자가 외에 더 더할 것도 더 뺄 것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분의 몸된 교회를 통해, 각자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이 가신 고통의 길, 영광의 길을 좇아 따를 것입니다.

이것이 주를 사랑하는 자, 곧 합력하여 선을 이루듯, 그분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바른 길입니다. 근본 교회는 십자가 사랑입니다.

♡도천 곽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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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아, my love>

우리 주님께 ‘교회’는 어떤 존재일까요? 사람의 마음에 떠오른 적이 없을 정도로(고전2:9), 우리 생각보다 훨씬 그 이상입니다. 그분은 교회를 너무나 귀히 여기기 때문에, 이 교회를 얻기 위하여 ‘그분 자신’을 주셨습니다(엡5:25).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피로 사오신 교회이며(행20:28),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산 값진 진주와도 같습니다(마13:46).

교회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야말로 ‘걸작품(masterpiece)입니다(엡2:10). 교회는 그분의 몸이요, 왕국이며, 결국 그분께 신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의 후반부로 갈수록 ‘신부’가 더 많이 등장합니다. 결혼 날을 준비한 어린양의 아내(계19:7),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인 새예루살렘(21:2),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그 영과 신부가 함께 등장합니다(22:17). 결국 신부는 하나님께서 얻기를 원하시는 최종 갈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그분의 전적인 사랑의 대상입니다. 신명기 32장 10절에 이스라엘을 ‘…자기 눈동자와 같이 지키셨다’고 말할 때, 눈동자라는 영어 표현이 ‘the apple of His eye'(흠정역, Darby번역 등)입니다. 이것을 직역하자면 ‘눈 속의 사과’라는 표현인데, ‘그분의 눈에 가장 소중하다’는 관용어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께 완전히 콩깍지 씌였습니다. 그분의 마음에는 연애하는 방식인 신성한 로맨스가 가득하며(렘2:2 참조), 이 사랑의 대상은 오늘날 그분의 교회입니다(엡5).

상징으로 가득한 책인 아가서에서 솔로몬 왕이 연인을 부르는 칭호는 “내 사랑이여”(my love), 또는 “나의 신부여”(my bride)입니다. 술람미가 솔로몬을 부를 때는 약간 시적인 표현인 “나의 사랑하는 이여”(my beloved)입니다. 말그대로 달달해서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신부라는 표현은 술람미가 어느 정도 생명 성숙이 있을 때인 4장에서 집중적으로 사용되지만, “내 사랑이여”라는 표현은 신부가 파라오의 준마와도 같은 시절에도 불렸던 칭호입니다(1:9,15). 즉 연인이 아직 성숙하지 못하여 여전히 제멋대로 일 때조차도 왕의 눈에는 “사랑”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생각만해도 기뻐 온통 연인 생각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My love, 내 사랑아..”

주님께 그분의 신부인 교회는 이와 같은 사랑의 대상입니다. 사랑을 주고자 하는 이에게 사랑을 받고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은 그분께 큰 기쁨입니다. 조금만 반응해도… “오 주 예수님, 사랑합니다”

기쁨이 크면 큰 어려움조차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신랑이신 그분은 “자기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시고 수치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신 것입니다(히12:2). 죄와 세상을 끝내셨을 뿐아니라 한 알의 밀로 신성한 생명을 해방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못하도록 바싹 달라붙어 압박하던 악한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을 벗기시었습니다(골2:15). 십자가 위에서조차 전쟁을 치루신 것입니다.

“그분 앞에 기쁨”이 신부라면, “우리 앞에 있는 기쁨(계19:7-9)은 자신을 준비한 신부를 맞이하러 오시는 ‘신랑이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대상인 신부이지만 ‘생명이 성숙’되어야 그분께 어울립니다. 개인이 아닌 ‘단체적인 신부’이기 때문에 건축되어야 하고, 결혼 예복을 준비하기 위해 일상생활 가운데 ‘주관적인 의’로 살아내야 합니다(계19:8). 신부인 교회는 흠이나 점이 없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합니다(엡5:25-27). 그럴 때 신랑이신 주 예수님은 신부를 맞이하러 오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 예수님은 “…내 기쁨이 여러분 안에 있게 하고, 여러분의 기쁨이 충만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 앞에 있는 기쁨은 그분으로부터 나온 기쁨인데, 그분 안에 있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다름아닌 바로 그분이 얻고자 하는 신부입니다.

이 기쁨이 우리 안에 있을 뿐 아니라 기쁨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점점 그분의 사랑스런 신부로 예비되어 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립시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결혼 날이 다가왔고, 그분의 아내인 ‘우리도’ 자신을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계19:7)”

-Ezer Kim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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