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세상 다 변하였어도!
“학이시습하면 불역열호라
유붕자원방래면 불역락호라
인부지이불온하면 불역군자호라”
-공자 논어의 학이편-
이 아침에는 공자와의 만남을 감격해 해 본다.
“배우고 적절하게 연습하고 경험하면 기쁘지 아니한가?
멀리서 뜻이 맞는 친구가 찾아 오면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이 알아 주지 않아도 노하지 아니하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기쁨은 배우고 적절한 때에 익히는 데서 온다.
즐거움은 뜻이 맞는 친구와의 만남에서 온다.
노여움은 자기를 알아 주지 않는 것에서 오지만, 군자는 이에 초연하다.”
전자는 강한 의문으로써 문장을 강조하지만, 후자는 일상의 서술문으로 역으로 풀어서 기쁨과 즐거움과 노여움의 근원을 풀어 보았다.
인생이란 희로애락으로 구성 되어 있다.
이 희로애락을 푸는 것은 학습과 뜻을 같이 하는 동지와 그리고 군자의 도를 지켜 가는 것에 있다고 하니, 우선 열심히 배우고 생활에 실천하는 것과 뜻을 같이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화이부동의 지혜로운 처신을 하면서 군자의 도리를 따라야 할 것이다.
사실 학습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공자를 찾은 것은, 다름 아닌, 출근 시내 버스의 학원 광고문에 ‘터득’이라는 단어를 우연히 만나게 된 계기로 인함이었다. 학습의 습과 터득이 의미하는 다른 점이 무엇인가? 하는 작은 호기심이 공자로 가는 길목에 문득 들어 서게 한 것이다.
‘터득’이란, ‘깊이 생각하여 깊은 이치를 깨닫는 것’이라 한다.
이에 비해 학습은 배우고 연습하고 반복하고 산 경험으로 익혀서 좋은 습관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학습과 터득은 일면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겠지만, 학습은 일상으로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거쳐서 배운 것을 몸에 배게하는 것이라면, 터득은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대상에 대해서 몰입하여 깊이 있는 생각을 통해서 이치의 깨달음에 다다르는 것으로 서로 구별 되어야 할 것이다.
학이시습지의 뜻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다음에 나타나는 절이 필자의 필에 꽂힌 것은, 필자는 이를 페밀리(가족, 피로 나눈 가족이 아니라, 뜻이 맞는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뜻으로 자주 표현한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자야 말로 위대한 선각자임을 알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잘 아는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다음의 가르침이다.
“열다섯에 지학하고, 삼십에 이립하고, 사십에 불혹이라, 오십에 지천명하니, 육십에 이순하고, 칠십에 종심소욕불유구라”
“십오세에 학문에 뜻을 두고, 삼십에 학문의 뜻을 세우고, 사십에 이치를 깨달아 흔들림이 없고, 오십에는 하늘의 뜻을 이해하니, 육십에는 무엇을 들어도 용서하고 알게 되고, 칠십에는 마음 가는 것이 하나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더라.”
정말 기가 찰 일이 아닌가?
과연 어느 누가 인생 살이를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이나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필자를 감탄하게 하는 이유는 바로 그가 진리로 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문에 뜻을 두고, 비로소 진리에 도달하는 그 여정에 일점일획의 어긋남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지학에서 이립하고 불혹을 거쳐서 지천명하고, 이순에서 종심으로 나아 가는 길이다.
아마 그의 나이 칠십이 되어서 비로소 이 말씀을 남긴 것이리라.
칠십의 종심 삼년 뒤, 그는 한 많은 긴 세상 여정을 마치게 된다.
어쩌면 종심인 것을 깨달은 마지막 나이에 이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그는 진리에 다달았으니, 더 이상 삶에 미련이 없었을 것이고, 그의 인생에 부과 된 무거운 사명의 십자가를 벗어 던지고, 하늘 나라로 훨훨 날아 올라간 것이다. 이게 사명자의 참 모습이다.
필자는 오래 전에 위정편에서 공자의 큰 모습을 이미 숙지하고 그와의 만남을 기약하고 있었던 터에, 올해 9월 28일에 공자의 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남종가묘가 있는 절강성 취저우에 초청을 받아 다녀 왔고, 오래 전에는 공자북종가묘가 있는 산동성 곡부에도 다녀 온적이 있었으니, 필자와 공자와의 인연이 우연만은 아닌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아침 천안행 전철 안에서, 논어 학이편과 위정편의 한자음을 입으로 살며시 읇조리면서, 그 배어나는 아름다운 정취에 취해서, 천안에 금세 도착했다. 최근 글에도 잠시 언급했듯이, 필자는 옛 날에 어려워 암기 못 했던, 가곡에 다시 도전해서 곡을 암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드디어 어제는 경복 테니스 송년회에서, 박자기 없는 생음악으로 ‘청산에 살으리라’에 도전 했는데, 아쉽게도 가사를 까먹어서 도중에 실패했다.
하나 배운 것은 공자가 말한 학습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혼자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실전에 약하면,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고, 실전에 강하기 위해서는 무엇 보다도 서로 어울리는 가운데 습을 행해야 할 것이고, 이는 다양한 환경과 상황에 대처하는 실패의 경험이 많이 쌓이는 가운데,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학습이든 터득이든지 간에,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을 명확히 해야 함은 당연지사의 일이다. 이제 하고픈 가곡과 팝송과 오페라 아리아와 더불어 공자의 논어를 읊조리는 것도 필자가 필히 수행해야할 또 하나의 과제 목록으로 선정했다.
“기나긴 세월 동안, 온갖 세상 다 변하였어도,
변하지 않고 의구할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르리라!”
♡ 안응 곽계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