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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케네디의 어록 중에 유명한 말에 “국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요구하기 전에, 당신이 먼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어귀가 있다. 

세상 만사는 내 하기 나름이고, 내 마음 먹기 나름이라고 한다. 

동서 고금의 철학과 사상은 모두가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자, 공자를 비롯한 소크라테스와  예수께서도 가르치시는 것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여기고 사랑하라!” 이다. 

그리고 “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원하는 것을 먼저 내가 남에게  해 주고, 내가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일상적인 가르침이 사실은 인간 전반에 걸친 소중한 근본이라고 하겠다. 

세상에 유토피아가 없다고는 하지만, 그 이유인 즉, 이런 평범한 철학을 업신여기고 실천하지 않는 게으름과 교만 때문이 아닐까? 노자와 공자는 이 유토피아를 이루는 근간을 ‘인의예지신’의 ‘덕’이라고 했고, 부처는 ‘자비’, 예수는 이를 ‘사랑’이라고 했다.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인간의 양심이라는 요소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양심에 의한, 양심을 위한, 양심의 실천이야 말로 우리들의 궁극적인 바탕이 아닐 수 없다. ‘양심’이야 말로 인간에게 부여된 진정한 ‘신의 성품’이 아닐까? 

인간에게는 크게는 신의 성품으로써, 덕과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지만, 솔직한 이야기로 하루 벌어 겨우 생명을 연명하고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는 그리 피부에 와 닫지 않는 것도 사실이 아니겠는가? 

우리 범부들에게는 덕이고 자비고 사랑이란게 별거더냐? 

밥 배부리 먹고, 잠 잘 자는 거지. ㅎㅎㅎ 

그러니, 성경에서 예수님 가라사데, “지극히 하찮은 사람에게 목 마를 때 물 한 그릇 떠 주고, 배 고플 때, 한 술 밥 동냥한 그 작은 베품이 곧 내게 배푼 덕이요, 자비요, 사랑이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덕이요 자비요 사랑에는 거창한 수식어가 전혀 필요 없다. 

그냥 함께 잘 먹고 잘 살 때에, 스스름 없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삶 속에 가장 하챦은 것을 실천하는 가운데에 있느니라.” 하나님 말씀이니라. 너희가 들을 귀 있을진데, 들을지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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