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생활은 하나님과의 치열한 씨름을 의미한다!
신앙은 하나님과 벌리는 치열한 투쟁의 역사다.
그 보기로 우리는 야곱을 예로 들 수 있다.
야곱은 그 상징으로 얍복강에서 하늘의 사자와 밤이 새도록 치열한 씨름 했고, 급기야는 환도뼈를 얻어 맞고, 축복을 조건으로 타협을 하게 되고, 그 결과 이름을 ‘사기꾼’이라는 의미를 가진 야곱에서 ‘하나님과 겨뤄서 극복한 자(God’s Overcomer)’ ‘하나님의 왕자(God’s Prince)’라는 명칭을 부여 받게 된다.
하나님과 씨름 한 결과,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은, 비단 상징적으로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향기나는 형상으로 회복된 성숙한 자로 변화된 자로서, 한 많은 야곱의 인생이, 아브라함이 약속 받은 축복을 이어 받아, 하나님의 백성을 세울 이스라엘로 확정된 것이다.
재미 있는 사실은, 당시에 누구도 하나님과 씨름 하느라, 애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야곱 홀로 세상에 떨어져서 이를 감당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는 부인도 있었고, 자식과 더불어 수 많은 가속들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야곱의 형 에서가 군사 400 을 데리고, 야곱을 죽일량으로 다가 왔을 때에, 야곱은 비겁하게도, 그의 가속들과 선물을 먼저 보내어서 에서를 달래어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는 것이다.
성경 역사 속에는 하나님이 세운 야곱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사실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 선택 되지 못한, 보편적인 인간 모두에게는 사실 거룩한 하나님의 행위는 너무나 가혹한 진실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성경에 이름을 올린, 하나님이 쓰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일대 일로 대면하여, 좋은 의미든지, 아니면 나쁜 어미든 간에 치열하게 겨루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치열한 관계가 설정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더 나아가서 야곱을 중심으로한, 그의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와 에서, 그리고 라반과 야곱의 아내들은 야곱의 타고난 자연의 생명을 신성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변화하게 하여, 결국 하나님의 왕자인 이스라엘을 탄생 시키기 위한 성령의 징계로 사용하는 도구로만 쓰였다는 사실을 간과 할 수가 없다.
창세기에서, 모든 만물이 오직 하나님의 한 사람 아담을 위해 준비 되었던 것처럼, 오직 한 사람인 야곱도 그와 같이 선택 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시대는 과연 어떠할까? 지금도 오직 한 사람, 하나님이 선택하여 이 땅에 보내신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예수를 우리 안에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만, 선택된 자로 하나님은 강권으로 결정하셨고, 지금 우리 사이에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요한 계시록이 이루어질 때까지 쉬지 않으시고 역사를 계속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몸 되시고 머리되시는 교회는 창세 전에 예수님과 함께 이미 이 땅에 완성되어졌다. 신앙 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이 몸 되신 교회의 지체로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지체로서 교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으로 완성된 교회를 섬기는 것 뿐인 것이다.
절대로 완성된 예수님의 몸을 우리 신앙인들이 다시 세우는 것이 아니다. 이로 인한 오해로 인해서, 지금 현대교회는 인간들의 탐욕과 교만과 혼돈의 죄로 가득 채워져서 바벨탑을 방불하는 심각한 실정이라고 하겠다.
하나님으로 가는 길은 쉽고도 넓을 수 있다.
오직 예수를 우리의 주님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허나, 아무리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밖는 희생을 하고 피나는 경주를 해도, 죄에 빠진 인간들은 복음을 들을 귀도, 하늘의 징조를 느낄 수 있는 영성도 결핍되어 있다.
따라서, “내 백성이 무지해서 망하는구나”하시며 가슴을 치는 하나님의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믿지 못하는 미련한 백성들은, 사망으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