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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지혜인가?

한 번에 한 걸음, 한 번에 한 사람만 안을 수 있는게 우리 인간의 한계이다.  지혜란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의 룰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다.  한 번에 열 걸음을 띄어 걸을려고 하고, 한 번에 두 세 사람을 안을려고 하니,  가랭이가 찢어지거나, 제비족이나 카사노바가 된다. 인생의 지혜 없음은 무지로  통하고, 이는 또 인간들을 불행으로 이끈다. 결국 인간의 무지는 사소한 욕심에서  나오는 것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종교의 화두는 비우는 것이다.  비우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한 번에 한 발자국만 띄고, 한 번에 한 사람만 품는 것이다.  결국 비움이란, 지혜로 가는 길이고, 이는 또 진리의 길,  참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기도 하다.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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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함, 그 사이에 놓인 깊은 고뇌?

행위와 믿음 간에 놓인 골짜기의 깊이를 인간의 머리로 가늠하기는 쉽지가 않다.  믿어라 해서 믿으면 행하라 하고, 행하라해서 행하면, 믿으라하고 행하지 말라고 한다.  골짜기 사이에 빠져 있는 성도들은 그야말로 머리가 팽팽 돈다.  그럼에도 진작 강대성에 서서 외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에 도전해서 인지,  믿음과 행함 사이에 깊은 골짜기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 줄타기를 잘 견뎌 내고 있는 듯하다.  믿음과 행함의 사이에 놓인 깊은 골짜기야 말로, 어쩌면 진리로 인도하는 하늘의 열쇠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분명한 것은 한 우물에서 쓴물과 단물을 내지 않듯, 믿음과 행함은 동시에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고,  이를 구별하는 골짜기의 경계가 존재해야 한다. 그렇다면, 야고보서에 인용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라는 가르침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문자적으로는 믿음으로 ‘행해야하는 것’으로  당연히 해석 될 것이고, 상식적으로도 매우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허긴 믿음이 좋은 사람은 선한  사람의 선행을 행하는 것이 다연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바울이 목숨을 걸고 로마서에서 가르친 “믿음으로 살리라”는 고백과 함께 성경 전반에  나오는 믿음의 의미가 모두 허당이 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행함의 의미, 즉 보이지  않는 믿음에 걸맞는 보이지 않는 행위에 대해서 고민을 해 보는 것은 어떨까? 선한 행위이긴 하지만,  세상 눈에 보이지 않는 행위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  믿음이 우리 스스로가 세운 공로가 아니고 은혜로 받은 듯이, “행위 없는 믿음은 사망이다”에서 인용된 보이지 않는 행여란, 곧 은혜로 받은 믿음처럼 은혜로 받은 행위가 되어야 하고, 이 은혜의 주체는 무익한 우리와 무관한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계획 하시고, 우리를 그의 자녀로 정하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다고 하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함이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야한다는 이야기다.  우리 스스로가 저지른 행위야 말로 믿음과는 전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가는 교만과 배반의 씨앗이된다. 주신 이도 하나님이요,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할진데, 우리의 모든 존재와 발전과 열매 맺음이 하나도 빠짐 없이 온전하게 하나님의 간섭으로, 섭리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하나님의,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에 의한 온전한 행위가 나타나는 믿음의 우리가 되어야 하리라.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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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십자가 짐, 자기 부인, 성화!

진정한 용서란, 하나님이 스스로 율법을 깨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용서의 문자적 의미는 죄를 눈감아 주는 것이다. 공의란 율법대로 죄를 처벌하는 것이다.  만약 죄를 지었는데도 제대로 법을 적용해서 처벌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불의한 것이요, 부정한 것으로 된다. 그렇다면 죄를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율법으로서는  용서가 허락되지 않는 것이고, 용서하는 자는 필히 공의로운 율법의 단죄를 받게 되어  있다고 하겠다.  예수는 근본 하나님이시면서 용서를 구하려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만드신 율법을 스스로 깨기 위해서 용서라는 새로운 성령과 은혜의 법으로  오신 것이다. 그리고 공의의 마지막 율법을 완성 시키시고자, 율법의 지시대로 십자가의  처형을 스스로 감당하게 되신 것이다. 율법의 시작이요, 끝이신 하나님께서 이제 율법을 끝내고,  생명 주시는 성령의 영으로서 새 시대를 열고자 하신 것이다.  이 구원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한 첫 시도가 바로 회개하는 백성들을 율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작업이고, 이를 우리는 용서라고 부른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용서는 없다. 왜냐하면,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율법이라는 높은  장애물을 걷어 치워야 하기 때문이다. 필히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은 율법에 대한 희생 재물에 해당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율법이란 죄의 범주를 정하는 것 외에,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선하게 사용된 것으로 이는 십자가를 지게 하여, 자아를 부인하게 하는 성화의  아름다운 목적을 이루게 한다고 하겠다.  ‘성화’란, 거룩하고 고매한 인격을 갖추기 위한 수양을 닦기 위함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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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적 인간의 허상!

인간은 도무지 선하지 않기에 하나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없다.  그러기에 인간이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인 기준에 의거해서 정의된 착한 행위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는 커녕, 도리어 패역한 자식이라는 저주의 대상이 된다.  아담이 에덴 동산을 쫒겨난 이후로 인간의 공로란 기껏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리는 수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고,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악의 열매일 뿐이며, 세상을  떠돌면서 죽을까 두려워 하여 에눅이라는 이름의 성을 튼튼히 세우고 세상 문화의  바벨탑을 세우는 것 외에는 하나님을 기쁘게 못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순전히 피조물의 존재로 지어졌기에 태생부터 창조주의 영광의 그릇으로 쓰임  받는 목적 외에 어떠한 ‘있음’의 자리도 주장할 수가 없다. 영원이라는 우주 안에서는 창조주  외에는 그 어떤 유한한 피조물의 존재도 ‘없음’이라는 낮은 존재감으로 실존할 뿐이다.  그러니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실제의 영원함 속에서는 ‘나’라는 에고의 실존은 발들일 틈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실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에고의 중심에서 영원 속으로 뻗어 나갈려고  발버둥치며 살고 있고, 이를 모래 위에 허상의 집을 짓는 허튼 수고라고 부른다.  창세 전부터 인간의 에고는 없는 것이기에 어떤 에고로부터 시작된 수고와 공로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불의한 인간의 허물과 죄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을 어린 아이나  어린 양으로 묘사되는 것은 이에서 피조물의 역할과 특징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있음’이라는 창조주와 ‘없음’이라는 피조물의 관계를 기술한 내용이다.  결국 성경의 내용은 비록 피조물을 위한 ‘없음’의 문자적 로고스로 기술 되었지만, 실제는 문자의  이면에 깔린 창조주의 ‘있음’의 내용, 즉 계시와 묵시에 관한 깨달음을 영감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  ‘있음’과 ‘없음’을 잇는 모든 역사는 오직 생명을 살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영인 성령만이 감당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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