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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적 인간의 허상!

인간은 도무지 선하지 않기에 하나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없다.  그러기에 인간이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인 기준에 의거해서 정의된 착한 행위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는 커녕, 도리어 패역한 자식이라는 저주의 대상이 된다.  아담이 에덴 동산을 쫒겨난 이후로 인간의 공로란 기껏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리는 수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고,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악의 열매일 뿐이며, 세상을  떠돌면서 죽을까 두려워 하여 에눅이라는 이름의 성을 튼튼히 세우고 세상 문화의  바벨탑을 세우는 것 외에는 하나님을 기쁘게 못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순전히 피조물의 존재로 지어졌기에 태생부터 창조주의 영광의 그릇으로 쓰임  받는 목적 외에 어떠한 ‘있음’의 자리도 주장할 수가 없다. 영원이라는 우주 안에서는 창조주  외에는 그 어떤 유한한 피조물의 존재도 ‘없음’이라는 낮은 존재감으로 실존할 뿐이다.  그러니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실제의 영원함 속에서는 ‘나’라는 에고의 실존은 발들일 틈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실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에고의 중심에서 영원 속으로 뻗어 나갈려고  발버둥치며 살고 있고, 이를 모래 위에 허상의 집을 짓는 허튼 수고라고 부른다.  창세 전부터 인간의 에고는 없는 것이기에 어떤 에고로부터 시작된 수고와 공로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불의한 인간의 허물과 죄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을 어린 아이나  어린 양으로 묘사되는 것은 이에서 피조물의 역할과 특징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있음’이라는 창조주와 ‘없음’이라는 피조물의 관계를 기술한 내용이다.  결국 성경의 내용은 비록 피조물을 위한 ‘없음’의 문자적 로고스로 기술 되었지만, 실제는 문자의  이면에 깔린 창조주의 ‘있음’의 내용, 즉 계시와 묵시에 관한 깨달음을 영감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  ‘있음’과 ‘없음’을 잇는 모든 역사는 오직 생명을 살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영인 성령만이 감당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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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와 성화?

진정한 회개는 참다운 진리의 깨달음에서 완성 되고,  회개의 완성은 구원으로 인도 된다.   성화란, 성령의 간섭을 받고 성령을 주님으로 섬기는  구별된 거룩한 성도들에게 임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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