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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은 오로지 신의 몫

글을 보면서, 판단은 오로지 하나님 몫이 되어야 한다는 강한 상념이 듭니다. 어차피 인간 세계에서는 최선만 있지 마지막 해는 없다는 것이 진리이고, 성경에서도 이를 줄기차게 계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과거 역사를 보면 개혁에 이어 또 다른 개혁의 줄거리로 반복되는 악순환의 연속의 원인은 여전히 하나님 권세를 이용하고자 하는 종교 기득권 세력을 중심으로한 그릇된 판단 기준으로 인함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판단,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 부족의 결과이고, 단지 인간의 권력욕에 의한 내로남불의 욕정의 결과라 여겨집니다.

왜? 그런 미숙한 판단의 악순환을 끊지 못하는지?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권위 대신에 분별력 없는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고자 하기 때문이겠지요?

“세상에 선한 자를 만날 수 있을까?”

예수님 말씀입니다.

세상에 선을 기대하는 것이 교만의 죄입니다.

♡도천 곽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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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시기 또는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의 시기이기도 했던 그 당시,
칼뱅에 맞서 관용을 내세웠던 카스텔리오. 그의 의견 중에 솔깃한 부분이 하나 눈에 띈다.

그는 이른바 ‘중간시기 윤리’, 혹은 ‘인테림의 윤리(Interim Ethics, 잠정성의 윤리), 곧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종말 시기의 재림과 심판 ‘사이의 시간(interim)’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는 결정적, 궁극적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리의 일치를 강제하려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심판하고 화형시키는 일(재세례파는 이단으로 낙인찍혀 광범위한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대신,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따라 생활방식을 바꿀 수 있을까를 논의하는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게 ‘관용’을 내세운 카스텔리오의 입장이었다.

판단은 하지만 중간시기에는 판단의 상대성을 스스로 엄격하게 확인해야 한다는 게 요점이다.
이른바 ‘자기상대화’,’자기객관화’를 견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그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 때문에 모든 판단도 상대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상대적이라고 단정하면 거기서 일종의 절대화, 일반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다만 고린도전서 13:12의 말씀처럼,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고

부분적으로 알기 때문에…

정통 혹은 바른 신학과 교리로(혹은 전체주의적 태도로) 인간의 자유와 양심까지 옥죄지 말라는 권고가 담겨있는 것이다.
판단은 역시 여러분 각자의 몫이다.”

-이강혁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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