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societyEntertainmentLife & Style

이중섭과 김환기, 그리고 고흐! -1

“한국의 고흐라고 불리우고 고흐 만큼이나 비운의 천재화가였던 대향(大鄕) 이중섭. 이중섭은 1916년 평남 평원에서 대지주 집안의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오산학교에서 스승인 임용련을 만나 서구의 새로운 예술에 눈을 뜨는 한편 남다른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고, 1935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원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일본 문화학원 미술학부(양화과)로 옮겼다. 당시 문화학원은 문부성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로 상류층 자제들이 많이 다녔다고 한다.

이중섭은 1938년 당시에 가장 전위적인 미술 단체로 일본 추상미술의 중심 그룹이었던 자유미술가협회의 제2회 공모전에 출품해 수상을 하고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43년 선전(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그만두고 원산에 머물렀다. 1945년에는 문화학원 재학 중 사귄 일본인 후배 야마모토 마사코가 홀로 현해탄을 건너와 그해 5월 원산에서 결혼했으며 마사코는 이남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결혼 후 이중섭은 원산사범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6·25전쟁 때 월남하여 종군화가 단원으로도 활동했으며 신사실파 동인으로도 참여했다.

1952년 부인이 생활고로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자, 부산, 제주, 통영, 진주, 대구 등지를 전전하며 그림을 그렸고, 재료가 없어 담뱃갑 은박지를 화폭 대신 쓰기도 했다. 부두노동을 하다가 정부의 환도와 함께 상경하여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전시는 호평이었으나 은박지 그림이 춘화라는 이유로 철거되고 팔린 그림 값을 떼이는 등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큰 실의에 빠졌다. 그는 일본에 보낸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도는 유랑 생활,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깊은 좌절과 자괴감으로 몸과 마음이 극도로 쇠약해져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1956년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다가 그해 9월 6일 서울적십자병원에서 홀로 숨을 거뒀다.

이중섭은 그야말로 ‘국민화가’라는 명칭에 걸맞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대중 화가이다. 빈곤과 절망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는 이중섭이지만 그가 처음부터 가난하고 힘들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로서는 여간해서 어려웠던 일본 유학도 다녀왔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또한 살아생전 화단의 평판도 좋았으며 1938년 이후 각종 상을 휩쓸면서 ‘천재’라는 타이틀을 획득함은 물론 촉망받는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기도 했다. 그런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은 6.25 동란으로 인해 월남하며 거처도 없이 떠도는 과정에서 떠나버린 일본인 아내와 아들의 사망, 그리고 지독한 가난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인간 이중섭을 괴롭혔지만 그러한 수난들이 없었다면 그의 인간애적인 부분은 보다 희석되었을 지도 모른다.

가난에 절어 절망하던 순간까지도 그림을 놓지 않았던 그는, 놀랍게도 민족동란의 참혹함 속에서도 그는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그는 판잣집 골방에서 콩나물시루처럼 웅크린 상태에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이나 부두에서 일하다 말고도 그렸다. 잘 곳이나 먹을 것이 없어서 그렸으며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면 못이나 연필로 그렸다. 때론 허무해서 또 때론 외로워서도 그렸다. 피난시절 세상을 전전하면서도 유화 2백여 점과 은지화 3백여 점 등 총 5백여 점의 작품들을 그렸다. 이 같은 사실들은 그에게 있어 그림은 곧 생존과 생활과 생애의 전부였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가 정신병을 앓으며 가난에 허덕였던 말년에 그려진 소에는 분노와 좌절의 느낌이 물씬하다. 그의 대표작 <흰 소>는 회색조의 배경에 검고 희 붓질로 된 독특한 작품이다. 검은 빛과 흰빛이 아울러진 거칠고 굵은 붓질은 거의 울분에 가깝다. 헌데 이중섭이 소보다 더 자주 그리고 애착을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아이들이다. 이중섭 생전 삶의 희망은 가족에게 있었다. 그림을 비롯한 그의 모든 것의 최종 종착지는 아내 이남덕을 포함한 가족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말년으로 갈수록 그는 보고 싶은 가족 곁으로 미치도록 돌아가고 싶어 했으며 뼛속까지 사무치는 그리움에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죽어서나 살아서나 고단한 현실은 그를 끝내 가족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달과 까마귀>는 휘황한 보름달이 뜬 푸르른 하늘을 배경을 바탕으로 친구를 찾아 모여드는 까마귀를 그린 그림으로 마치 문인화의 진한 먹으로 툭툭 쳐내듯 일획으로 표현된 까마귀들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이중섭이 다루었던 새들이 비둘기를 포함해서 주로 평화나 환희를 상징하는 길조들이었던 데 반하여 까마귀를 소재로 다루었다는 점이 이채롭다. 노란 보름달이 뜬 맑고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검게 세 가닥으로 그어진 전깃줄에 앉은 까마귀의 모습을 그렸는데, 수평으로 그어진 세 개의 전선이 전체적인 풍경을 이끌어 가며, 그 위로 다섯 마리의 까마귀가 변화를 주고 있다. 까마귀의 모습은 극히 간결한 필치로 그려졌고, 까마귀의 여러 가지 동작들이 표현되어 있다. 달빛을 받은 까마귀의 동공이 노란 빛을 띠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평범한 풍경화이지만, 까마귀가 상징하는 의미 때문에 죽음에 대한 예감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다. 달과 이야기를 나누듯 달을 보면 누군가를 향한 애잔한 그리움과 간절한 소원을 가슴속에 그리듯이 이중섭도 현실의 어려움을 탈출할 소원을 비는 의미에서 달을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날아오는 한 마리를 반기는 까마귀 떼들을 부러워하는 듯 보이는 외로이 떠있는 달에게서 이중섭의 마음을 엿보는 듯하다.

<달과 까마귀>를 보면 고흐의 <밀밭위의 까마귀>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고흐가 이 그림을 그리고 자살하였기에 이중섭의 이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왜곡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고흐의 까마귀가 음산하고 암울한 반면 이중섭의 까마귀는 밝고 명랑하다. 몰론 이중섭의 그림이 노랑과 파랑으로 이루어져 있어 고흐의 정서와 맞닿아 있지만, 색깔과 소재만으로 두 작품이 동일한 의도를 가졌다고 단정지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중섭의 까마귀에서는 밝은 행복과 희망의 기원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가난때문에 사랑했던 아내 마사코와  두 아이도 떠나보내게 되고 사십세의 나이에 외롭게 죽어간 불운의 화가였지만 화가 이중섭처럼 그림과 인간이 예술과 진실이 일치한 예술가는 없었다. 자신을 짖누르고 있는 듯한 모든 것들이 나를 비웃듯이 유유히 잘도 흘러가는 듯이 보이지만,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저 희망의 달을 보게 되는 것은, 녹녹치 않은 현실 속에서도 그래도 희망을 바라고 마음의 표현이 아닌가 싶다.” 
– 김규봉님 –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