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society

내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자!

요즘 걱정이 하나 있다. 

스마트폰으로 페북을 많이 이용하다보니, 모르는 사이 시력이 많이 상한 것 같다. 가끔은 내가 보고자 하는 욕심에 부합하지 않을 때에는 답답한 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제는 손톱과 발톱을 깎으면서, 살이 찐 죄로 발톱을 제대로 각도를 가지고 온전히 깎기가 예전 같지 않게 힘이 많이 든다. 늘 숨이 차는 자신을 바라보기가 민망할 정도에 다달았다.

일상 당하는 것 중에 힘든 것은 또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앉아서 꾸부린 채 용변을 볼 때이고, 더 한심한 것은, 뒷처리가 예사롭지가 않다는 것에 있다. 거의 전쟁 수준에 달할 정도로 치열한 숨을 몰아 쉬어야 한다. 

이런 류의 곤란을 당할 때마다, 예전과 달라진 모습을 통해서 나라는 존재의 한계성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마치 이것이 나의 모든 것이 된 양으로 답답하고 한심한 존재로 느껴지기도 한다. 필경 나라는 존재는 거추장스럽기만하고 문제에 갇혀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 같은 심각한 패닉 증세에 봉착할 것 같은 막다른 느낌을 가진 적도 있었다.

이와 같이, 육체의 변화에 따른 나라는 존재는 육신의 노화현상에 따른 한계를 극복할 수가 없고, 이에 따른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서 자신감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간혹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 본다. 내 육신의 한계에 갇힌 나라는 존재를 탈피할 방법은 없을까? 이 답답하고 걱정 투성이인 나라는 존재감을 극복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그렇다. 문제 투성이로 여겨지는 나를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육신을 넘어서는 지경에 새로운 나, 참 나를 좌표 설정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을 때에는 차라리 눈을 감는 것이고, 듣기지 않을 때에는 귀를 닫는 것이고, 말이 어눌할 때에는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나’라는 약하디 약한 존재를 그냥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육신의 문제에 집중하기 보다는 자연의 이치에 온전히 순응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보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 놓는 것이요, 듣고자하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요, 말하고자 하는 교만을 버리는 것이리라. 

더 나아가, 육신에서 영혼의 눈과 귀와 입으로 대체하는 것은 어떨까?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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