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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님 영으로!

너무나 소중하고도 멋진 비밀을 얻어 내셨습니다. 이 비밀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특별한 배려입니다. 

그리스도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한 그분의 남은 고난, 즉 우리가 푯대를 향해 달려가 받을 상을 위해 특별히 우리에게 남겨 두신 것이다. 

어찌 부족한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부족을 나타내시면서까지, 우리들이 감당할 분량의 고난을 통한 교회의 아름다운 향기를 세상에 나타낼 수 있도록 하신 것인가? 이 얼마나 주님의 놀라우신 긍휼의 비밀인가? 

주님이 육신으로 겪으신 고난 중에 하나는 우리의 죄를 구속하기 위한 십자가 위에서 이미 완성 된 고난이다. 이는 전적으로 주님 홀로 감당할 수 밖에 없는 엄청난 고난에 대한 예수께 지워진 수난의 짐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신랑 되신 어린 양의 신부 될, 주님의 몸 된 마지막 교회인 아름다운 성 예루살렘이 이 땅에 내려올 그 날, 신랑 예수님의 수고와 함께, 성도인 우리들에게 특별히 남겨 놓으신 고난의 몫이다. 

이 고난을 능히 담당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성령님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성전 건설을 위한 설계도 대로 우리를 인도하게 하신 것이다. 

이는 구약 말미의  <스가랴 4:6-10>의 환상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이 스룹바벨의 손에 성전을 지을 재료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에서, 디딤돌과 다림줄 등, 성전을 완성하기 위한 우리들이 감당해야할 사명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을 함께 공유해 본다. 

특별히, 하나님의 성전은 비록 고난 속에 그리스도가 남긴 부분을 담담은 해야 하지만, 우리들 힘이나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영으로 되신다고 가르치고 계신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하리라 하셨고,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 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This is the word of the LORD unto Zerubbabel, saying, Not by might, nor by power, but by my spirit, saith the LORD of hosts. Who art thou, O great mountain? before Zerubbabel thou shalt become a plain: and he shall bring forth the headstone thereof with shoutings, crying, Grace, grace unto it. 

Moreover the word of the LORD came unto me, saying,  The hands of Zerubbabel have laid the foundation of this house; his hands shall also finish it; and thou shalt know that the LORD of hosts hath sent me unto you. 

For who hath despised the day of small things? for they shall rejoice, and shall see the plummet in the hand of Zerubbabel with those seven; they are the eyes of the LORD, which run to and fro through the whole earth).” <스가랴 4:6-10> 

 《(참고) 스룹바벨 뜻 : 바벨론에서 낳았다: 

다윗의 후예 스알디엘의 아들로서 바사인들은 세스바알이라고 부른다. 바벨론 포로시에 생장하여 그곳에서 양을 치다가 바사왕 고레스가 유대인을 석방하여 고국으로 귀환시킬 때 인솔자가 되어 느부갓네살이 약탈하여 갔던 성전 기명을 찾아 가지고 5만명의 동족을 인솔하여 고국에 돌아와 성전과 성곽을 재건 하였다.》<스 1-5:, 눅 3:27> 

♡ 응재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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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고난》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받는 나의 고난을 기뻐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웁니다.” (골 1:24)

I now rejoice in my sufferings on your behalf and fill up on my part that which is lacking of the afflictions of Christ in my flesh for His Body, which is the church;(Col.1:24)

바울은 1장 24절에서 『이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부족한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놀랐고 난처했다.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부족함이 있을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그 당시에 나는 그리스도에게 어떤 부족함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완전히 종교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부족한 고난을 채우려 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이미 완전하지 않은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고난이 몸을 위하여 완전케 될 필요가 있는가? 주 예수님은 두 종류의 고난, 즉 구속을 위한 고난과 몸된 교회를 산출하고 건축하기 위한 고난을 겪으셨다.

우리 중 누구도 구속을 위한 그분의 고난에는 참여할 수 없다. 우리가 이 고난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신성 모독이다. 그분만이 구속자이며, 구속을 위한 고난은 그분이 완전히 성취하셨다. 우리에게는 구속을 위한 주님의 고난에 참여할 자격도, 지위도 없다. 예표에 의하면, 속죄일에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를 하는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가도록 허용되어 있었다. 그 대제사장은 구속을 성취할 수 있고 구속을 성취할 자격을 갖춘 유일한 분인 그리스도의 상징이었다. 많은 구절들이 구속의 성취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의로운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분은 이러한 종류의 고난을 받을 자격을 갖춘 유일한 분이시다. 히브리서 9장 26절과 이사야 53장 3절- 5절, 7절-8절도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구속을 성취하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고난에 참여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것을 담당하셨다. 우리는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참여할 수 없지만, 만일 우리가 그분께 신실하다면 그분의 몸의 산출과 건축을 위한 그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 바울은 이 점에 있어서 우리의 본이었다.

그는 개심한 후 즉시 몸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러한 고난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어떤 것도 부족할 수 없다는 관념과는 반대된다. 이 관념에 따르면,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이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완전하다. 그러나 여기에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 중 한 가지가 부족함을 말해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의 몸을 산출하고 건축하기 위한 그분의 고난이다. 그분의 몸을 산출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큰 괴로움을 당하셨다. 그러나 이 괴로움은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완전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분의 신실한 자들이 이 부족함을 채울 필요가 있다. 바울은 구속을 위하여 괴로움을 당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산출하고 건축하기 위해 고통을 겪은 것이다.

사도 바울은 믿는이들이 따라야 할 본이었다(딤전 1:16). 우리는 바울을 너무 높은,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을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여기지 말고 하나의 본으로 여겨야 한다. 주님의 긍휼로 바울이 우리를 위한 본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그가 어떠하다면 우리도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긍휼을 믿어야 한다. 주님의 긍휼이 바울을 하나의 본으로 만드셨다면, 그분의 긍휼은 바울 안에서 행했던 것과 똑같은 것을 우리 안에서도 이루실 수 있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의 산출과 건축을 위해 고통을 겪은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교회를 위해서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리스도는 그분의 몸을 산출하고 건축하기 위해 괴로움을 당하는 데 앞장서셨다.

그러나 사도들과 믿는이들은 이러한 괴로움을 당하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좇아야 한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주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낳고 산출하는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한 많은 밀알을 산출하기 위하여 땅 속에 떨어져 한 알의 밀로서 죽으셨다. 요한복음 12장 26절에 의하면, 그분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그분을 따라야 한다.

누가복음 12장 50절에서 주 예수님은, 『그러나 나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에서 침례라는 단어는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만유를 포함한 죽음, 즉 구속뿐 아니라 거룩한 생명의 해방을 통한 몸의 산출을 위한 죽음을 의미한다. 마가복음 10장 38절과 39절에서 주님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분명히 하신 것처럼 그들도 또한 그분이 받으셔야 할 침례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었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통을 알려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고난은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몸의 건축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통을 가질 수는 없지만,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통은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골 LS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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