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바로 그날, 세계 평화장전이 선포 된 날!
10월 26일,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안중근 장군이 하얼빈 역에서 일본 총리, 이등방문을 저격해서 거꾸러트린 날이다. 그를 테르리스트 정도로 격하 하고픈 일본 이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안중근은 하챦은 일본의 총리를 향해 피스톨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 아니라, 광란의 일본이 저지런 횡포에 대해서, 무지한 전 아시아 국민들의 잠자고 있었던 의식을 깨우기 위한 한 방의 총성 이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이등방문 총리는 현대 일본 지폐에 그의 얼굴을 담을 정도로, 일본이 전 아시아를 상대로 식민지 침략을 행한 제국주의 일본의 신화와 같은 존재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 일본의 심장과 같은 이등방문을 겨냥한 안중건 의사의 결행은 동방 평화의 시작을 알리는 평화의 종소리와 같은 신성한 세계평화장전을 선포한 그 날로 기념 되어야 한다.
이제 이 땅 위에서 약육강식의 동물적 본능을 깨끗이 소멸시켜서 인류의 참혹한 비극적 전쟁이 더 이상 정당화 되지 않도록,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세계 만방에 기쁜 소식으로 알려야 할 것이다.
♡ 안응 곽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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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사살》
(서울=연합뉴스) 한일합병 1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중국 하얼빈역.
일본 제국의 전 총리이자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원로정치인으로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1841~1909)가 탄 열차가 도착했다. 이토는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초프와 역 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했다. 이때 일본인 옷차림으로 환영 인파 속에 있던 안중근(1879~1910) 의사가 갑자기 앞으로 뛰어나오며 브라우닝 권총을 발사했다. 3발의 총탄이 이토의 심장 등에 명중했고 수행비서관과 하얼빈 총영사 등 일본 관리 3명도 중경상을 입었다. 의거 후 의사는 권총을 내던지고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쳤다.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이내 숨졌다.
안 의사는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 감옥에 수감된 뒤 속전속결로 진행된 재판으로 이듬해 2월 14일 사형이 확정돼 3월 26일 집행됐다. 31세의 ‘짧지만 굵은’ 생애를 마감하는 순간이었다. 안 의사는 경찰 심문 때 이토가 대한민국 주권을 빼앗아간 원흉이고 동양 평화를 해쳤으므로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총살했다며 살인범이 아닌 전쟁포로로 대해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황해도 해주의 천석지기 대지주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안 의사는 조부로부터 한학과 조선역사를 배웠다.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가 많았던 부친의 영향으로 서양 문명에 일찍 눈을 떴다. 어릴 때는 말 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하며 호연지기를 길렀다. 숙부와 포수로부터 사격술을 익혀 명사수로도 이름을 날렸다.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키며 한국을 식민지화하자 안 의사의 의병활동이 본격화했다. 1907년 연해주로 망명, 의병부대를 조직해 국내 진공작전을 펼친 것이다. 1909년 1월에는 김기룡 등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고 약지 마디를 잘라 이토와 매국노 이완용을 3년 안에 죽이지 못하면 죽음으로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맹세했다.
1909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 교포신문인 ‘대동공보’사에 들렀다가 이토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하얼빈 거사를 감행한 것이다.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타향에서 사람이 죽었을 경우 시체를 고향 선산으로 가져다가 장례를 치르는 것)하지 말라…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집행 직전에 면회온 정근·공근 두 아우에게 남긴 유언이다.
ryu625@yna.co.kr